북이영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에 경희궁의 경호를 목적으로 설치한 어영청(御營廳)의 분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경희궁의 경호를 목적으로 설치한 어영청(御營廳)의 분영.
내용

경희궁의 북문인 무덕문(武德門) 밖 지금의 사직동에 있었다. 청사 건물은 68칸이다. 경희궁 경호의 주력부대로서 왕이 여기에서 거주할 때는 어영청의 임시 본영이 되었다.

이때는 천총(千摠)·기사장(騎士將)·파총(把摠)·초관(哨官)·별무사(別武士) 각 1인이 기사 25인, 별파진(別破陣)·취고수(吹鼓手)·대기수(大旗手) 각 6인, 지방군 61인을 거느리고 대기 근무하였다. 북이영은 1624년(인조 2) 총융청이 처음 설치될 때 본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669년(현종 10) 총융청이 삼청동으로 이사하면서 다시 어영청에 예속되었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