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과 조선 초의 사농시(司農寺) 혹은 전농시(典農寺)를 세조 때 봉상시에 병합시킨 뒤에 부르던 칭호이다. 이는 고려 충선왕 때 전농사(典農司)란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어 적전(籍田)의 관리와 국가 제사에 소요되는 곡식 및 희생(犧牲)을 담당하였다.
조선에서도 1392년 개국과 함께 사농시를 설치하고 판사(判事) 2원, 소경(少卿) 2원, 승(丞) 1원, 겸승 1원, 주부(主簿) 1원, 직장 2원을 두었다가, 1401년(태종 1) 전농시로 개칭하고 영(令)·부령(副令)·정(正)·부정(副正)을 더 두었다. 1414년에 영과 정을 윤(尹)으로, 부령·부정을 소윤으로 고쳤다가 세조 때 봉상시에 병합시키고 소속관원도 모두 해산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동적전(東籍田)과 개성의 서적전(西籍田)을 관리하기 위하여 분봉상시란 부서를 두고 봉상시의 낭관(郎官) 2인을 배정하여 각기 적전을 관리, 운영하게 하였다. 분봉상시의 연간예산은 쌀 132석이었고 선혜청에서 조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