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와 당태종의 고구려침입과 관계가 있는 성이다. 614년(영양왕 25) 수나라의 내호아(來護兒)가 요동만(遼東灣)에 상륙하여 비사성(또는 卑奢城ㆍ沙車城)에 이르자 아군이 맞아 싸웠으나 이를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모두 전쟁에 지쳐 있던 시기였으므로 영양왕의 타협안을 받고 수양제는 뒤에 귀국하였다.
그 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대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비사성을 엄습하였다. 비사성은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문(西門)으로만 오를 수 있었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어 8,000여명의 주민이 생포되었다.
발해 때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요해주(遼海州) 남해군절도(南海軍節度) 관할이었고, 중국의 영토가 된 후에는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에 속하였으며, 금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하였다.
비사성은 중국에서 평양에 갈 때 꼭 들러야 하는 교통상의 요로(要路)에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은 곳이다. 비사성의 지명 유래는 ‘장성(長城)’이라는 뜻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