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 B6판. 142면. 작자의 제3시집으로 1956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하였다. 시집 말미에 백양촌(白楊村)의 발문이 있으며 8·15광복 이후 6·25를 거쳐 1956년까지 씌어진 작품들로 제목상으로는 총 55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제 및 소재에 따라 6부로 나뉘어 있다.
‘흰 석고상(石膏像)’장에는 「삼대(三代)」 등 5편, ‘슬픈 평행선(平行線)’장에 「귀향시초(歸鄕詩抄)」 등 13편, ‘근영수제(近詠數題)’장에 소제목(小題目) 속의 단시(短詩)까지 15편, ‘빙하(氷河)’장에 표제시 「빙하(氷河)」를 비롯하여 「스켓취」 속의 단시 2편을 포함 15편, ‘청산별곡(靑山別曲)’장에 「나무등걸에 앉아서」 등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목가시인으로 호칭되던 초기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6·25라는 거대한 민족적 시련과 여러 인간 조건 앞에 새로운 자기증명을 모색한 것으로, 시 생애의 중기(中期)를 압축하고 있다.
표제시 「빙하」에서도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아예 서럽진 않아도/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한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중략)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되어/남은 피 한 천년 녹아/철철철 흘리고 싶다”라면서 후기 시의 짙은 현실 개입을 예고하고 있다.
그 밖에 해방 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36년간의 식민사를 압축한 「꽃덤풀」, 그리고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 속에 “나무는 나무끼리/짐승은 짐승끼리/우리도 우리끼리/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한 「대춘부(待春賦)」 등을 보면 역사의 조명권에서 소외된 이웃이 강하게 굴절되어 나타난다.
이 때부터 석정 시의 ‘이웃’은 그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옹호하려는 민족 실체의 다중(多衆)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자연친화(自然親和)라는 시인 본래의 영역을 완전 배제한 것은 아니며 가급적 이 양면 세계를 함께 지니고 싶어했다.
다만 문학과 예술의 거의 자기도 모르게 겨냥해온 것은 언제나 인간생존의 기초로서의 공동체적 연관을 환기하는 일이었음을 상기할 때 시집 『빙하』를 통한 시적 변모는 나름의 자기 문법을 획득하고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