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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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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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왕경의 편재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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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 왕경의 편재구역.
내용

육부 중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2년(유리이사금 9) 종래의 육촌(六村) 중의 하나이던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을 개명하여 사량부라 하고, 이에 최씨성(崔氏姓 : 삼국유사에는 鄭氏姓이라 하였음)을 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아마도 469년(자비마립간 12) 서울의 방리(坊里) 명칭을 제정했을 때 종래의 족제적 사회조직을 행정조직으로 개편함으로써 나타난 것인 듯하다.

급량부와 더불어 육부 중 가장 우세한 존재로, 남천(南川) 이북, 서천(西川) 이동, 북천(北川) 이남일대를 포함했던 것으로 추측되며(일설에는 西川 이서, 仙桃山 이동으로 추리함), 김씨출신이 중심이 된 조직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가 망한 뒤 고려는 940년(태조 23) 이를 남산부(南山部)로 고쳤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의 기원문제」(이병도, 『진단학보』 8, 1937 ;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사로육촌과 경주고분」(김원룡, 『역사학보』 70, 1976)
「신라 상고시대의 육촌과 육부」(이종욱, 『진단학보』 49, 1980)
「新羅六部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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