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지방행정구역인 5소경(小京)의 장관직이다. 신(臣)은 대등(大等)의 중국식 표기이며, 따라서 일명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신라 하대에는 ‘대윤(大尹)’이라 별칭되기도 하였다.
취임할 수 있는 관등범위는 경위(京位) 4등인 파진찬(波珍飡)에서 9등인 급찬(級飡)까지로 6두품(六頭品)과 진골(眞骨)이 임명될 수 있으나 소경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진골 신분에 속하는 자만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소경은 514년(지증왕 15) 아시촌(阿尸村)에 처음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에는 소경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듯하다. 소경의 장관을 사신이라고 한 것은 564년(진흥왕 25)의 일이며, 565년에 처음으로 국원소경(國原小京 : 지금의 충주지방. 뒷날 中原京으로 불림.)에 아찬(阿飡) 춘부(春賦)를 파견하였다.
사신에 대한 설명으로는 무관직과 구별되는 문관직으로 보고 주(州)의 장관인 도독(都督 : 軍主의 후신)에 버금가는 직책으로 이해하는 설과, 도독보다는 현격히 낮고 군(郡)의 장관인 태수(太守)와 비슷한 직책으로 파악하는 설이 있다.
신라 하대에 김양(金陽)이라는 사람의 관력(官歷)을 보면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를 역임하고 중원(中原)의 대윤을 거쳐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전보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사신은 도독과 태수의 중간적 위치에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신이 직책상으로 도독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경이 갖는 특수한 성격에서 기인한다. 소경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을 연고지로부터 유리시켜 이곳으로 사민(徙民)함으로써 공동체적 유대를 단절시키고 재기를 방지하여 중앙집권적 지배체제하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서 설치한 특수한 행정구역이다.
나아가 소경은 지방의 문화적 중심지로 작용하면서, 왕도 경주가 신라 영토의 동남쪽에 치우친 한계를 극복하는 구실도 담당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경의 장관인 사신은 도독보다 관등상 열등한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도독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사신은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특수한 직책이었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그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 사신의 아래에는 그 보좌관으로서 사대사(仕大舍, 일명 少尹)라는 직책이 있었다. →오소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