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에서 국왕 혹은 동궁(東宮)을 받드는 일종의 근시직(近侍職)으로 ≪삼국유사≫와 금석문(金石文)에는 흔히 내양자(內養者)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진흥왕순수비 중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磨雲嶺碑)에 보이는 이내종인(裏內從人)은 이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짐작된다. 사인제도는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던 듯하다. 법흥왕 때 순교한 이차돈(異次頓)도 바로 사인출신이었다.
그 뒤 진평왕 때에는 사인직이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상사인(上舍人)·하사인(下舍人)으로 분화되었으며, 역시 사량궁(沙梁宮) 같은 데도 사인을 두었다. 신라통일기에는 중국제도의 영향을 받아 동궁 관속의 하나로서 중사인(中舍人)을 두었는데, 경문왕 때의 명필 요극일(姚克一)은 바로 이 중사인을 역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