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 또는 內爾米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사천으로 고쳐 견성군(堅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 양주(楊州) 임내에 속하게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양주도호부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주와 연천(漣川)을 잇는 도로변에 발달한 취락으로, 소요산(逍遙山)을 중심으로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만드는 비옥한 토지는 풍부한 농작물을 생산하였다. 당시는 비록 하품(下品)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한탄리(大灘里)에 자기소(磁器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천 부근에 가정자(柯亭子)가 있었고, 북쪽에는 이곳의 물산을 모았던 북창(北倉)이 설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