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 군국주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 침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는 남만주를 거점으로 활발히 전개되던 우리의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계획된 행동으로, 자금 부족과 내부 분규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최후의 비상 대책을 세워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즉, 적은 경비와 인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의열 투쟁이었다.
실행 책임자인 김구(金九)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적임자를 물색했고, 이봉창이 첫 번째 행동 대원으로 선발되었다. 김구는 이봉창과의 면담에서 그가 확고한 의지의 소유자임을 판단하고, 일본 천황을 암살하는 대임을 맡겼다.
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이봉창을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시키면서 “나는 적성(赤誠)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게 하였다.
이봉창은 상해(上海)를 출발해 12월 22일일본 고베(神戶)를 거쳐서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동경 시내에 머물면서 기회를 살피던 이봉창은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신년 관병식에 천황이 참석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고 거사 일정을 정한 뒤 즉시 한인애국단장 김구에게, “상품(商品)은 1월 8일에 꼭 팔아 버리겠으니 안심하소서.”라는 전보를 보내 거사 일정을 통보하였다.
1월 8일 아침 그는 두 개의 폭탄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궁성 사쿠라다문 밖 경시청(警視廳) 정문 앞에서 일본 천황을 기다렸다. 이봉창이 기다린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관병식을 마친 일본 천황의 행렬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일본 궁내부대신이 탄 두 번째 마차를 천황이 탄 마차로 오인하고 폭탄을 던졌다.
요란한 폭음과 동시에 궁내부대신이 탄 마차가 부서지고 근위병이 탄 두 필의 말이 쓰러졌다. 행렬은 갑작스러운 폭음에 수라장이 되었다. 다시 두 번째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불발이 되었고, 그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이봉창은 1932년 9월 16일동경대심원에서 비공개로 재판을 받았으며, 9월 30일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천황 폭살 의거는 실패했으나 그 여파는 상상외로 컸다. 이 사건은 침체되어 가던 우리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는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정계를 발칵 뒤흔들어 놓았다. 즉, 당시 일본 내각은 천황폭살사건에 책임을 지고 총사직서를 제출했으며, 경시청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경비 책임을 물어 파면 처분되었다.
한편, 일제 침략으로 만주를 빼앗긴 중국에서는 이 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사쿠라다문의거에 찬사를 보냈다. 동시에 천황을 폭살시키지 못한 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기관지인 『국민일보(國民日報)』는 「한국인 이봉창 저격 일황 불행부중(韓國人李奉昌狙擊日皇 不幸不中)」이라는 표제 아래 사건을 보도하였다.
이에 일본은 “불행부중”이라는 표현에 크게 격분해 주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신문사와 국민당 당사를 습격·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이 의거가 중국항일회(中國抗日會)의 사주를 받고 일어난 것으로 보고 중국 정부를 공격하였다. 이와 같은 중·일 간의 대립은 양국의 국민감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일제가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