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좌평(大佐平)의 직에까지 올랐다. 백제 후기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였던 사택씨(砂宅氏 또는 沙宅氏:沙氏로 약칭되기도 함.) 출신으로서 나지성(奈祗城)을 세력기반으로 하였다. ≪일본서기≫ 고교쿠기(皇極紀) 원년(642) 7월조에 대좌평 지적(智積)이 나오고 있다.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을 사택지적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을 종합해보면 사택지적은 642년(의자왕 2) 도왜(渡倭)하였다가, 백제로 돌아온 뒤, 654년 노재상(老宰相)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퇴관은 642년 의자왕이 왕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 강화된 왕권의 대귀족(對貴族) 통제력에 말미암은 것이다. 사택지적비는 그가 만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