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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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문헌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의병장 이순구가 이한구 · 정순기 · 정환직 등의 의병활동에 관하여 저술한 의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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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의병장 이순구가 이한구 · 정순기 · 정환직 등의 의병활동에 관하여 저술한 의병록.
내용

목활자본. 이순구(李純久)가 엮었다. 권두에는 권두사가 있고 권말에는 참동계(參同稧)의 시종(始終)과 소서(小序)가 있다.

권두사에는 조선의 자연환경과 입지적 조건을 기술하면서 1592년(선조 25)에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을 묘사하고,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변화된 사항을 기술하였으며, 이어 한말 일본의 조선침략과정과 이에 대항한 의병활동을 싣고 있다.

특히, 전 도찰사(都察使)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장남 용기와 의병을 일으켜 의진(義陣)의 부서를 편성하고 이름을 산남진(山南陣)이라 하여 일본군과 싸웠던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경(卿)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라고 하며 짐(朕)·망(望)이라는 두글자의 밀지를 정환직에게 주자, 환직은 아들 용기로 하여금 귀향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도록 독려하는 동시에 동지를 규합, 국권회복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자기의 당부로 아들 용기가 귀향하여 의병활동을 벌이다가 잡히자 1906년 8월 백방으로 주선하여 석방시키고, 다시 이듬해 부자가 5월 강릉에서 만나 경성(京城)을 공략하기로 기약하였다.

그러나 의진의 북상(北上)이 지체되므로 1907년 9월 독려차 하향한 정환직은 아들 용기가 입암(立巖)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자, 마침내 산남의진 의병대장이 되어 항거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이 책은 한말 의병에 관한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현재 이한구의 아우인 순구가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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