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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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제도
신라시대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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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의 관직.
내용

상문사(詳文司)에 소속되어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설치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714년(성덕왕 13) 2월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쳤다.

경덕왕 때 다시 한림(翰林)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771년(혜공왕 7)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당시 한림대(翰林臺)가 설치되어 소속관원으로 낭(郎)·대조(待詔)·서생(書生) 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림의 정확한 명칭은 한림랑(翰林郎)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 뒤 헌강왕 무렵 한림대를 서서원(瑞書院)으로 개편한 듯한데, 이 때 학사직(學士職)을 두었다. 신라통일기의 대표적인 학자·문인들은 대개 이 직책을 역임하였다. → 통문박사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나말여초(羅末麗初) 근시기구(近侍機構)와 문한기구(文翰機構)의 확장」(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한국연구원, 1984)
「新羅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通文博士と倭典をめぐつて-」(濱田耕策, 『旗田巍記念朝鮮歷史論集』 上,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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