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주로 유행하였다. 신라와 가야의 유물 중에는 말탄사람〔騎馬人物〕·배탄사람〔乘船人物〕을 비롯한 여러 가지 모습의 인물·동물, 그리고 어떤 기물(器物)을 본뜬 독특한 상형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들 상형토기는 흙으로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성격상 토우의 범주에 포함시켜 볼 수 있지만 장식성을 가진 완전히 독립된 형태의 토우와는 구별된다.
상형토기는 뛰어난 조형감각을 지닌 것으로 지금까지 이형토기(異形土器)란 말로도 불려왔다. 상형토기는 중국의 토용(土俑)이나 일본의 하니와〔埴輪〕등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를 본떠서 만들고 있다. 다만, 중국의 토용은 부장명기(副葬明器)로서의 뚜렷한 목적이 있고, 일본의 하니와도 고분의 외곽을 장식하는 독특한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신라·가야의 상형토기는 인물·동물·기물을 본떠서 만든 면에서는 같으나, 그 모양이 대체로 가운데가 빈 중공형태(中空形態)라 용기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의식이나 행사에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물이나 술을 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들은 금령총(金鈴塚)과 같이 금관·귀걸이 등 화사한 유물 속에 섞여서 반출되기도 하고, 계림로의 작은 독〔甕棺〕이나 고분에서 출토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출토지나 출토 상태가 알려져 있지 않은 채 소개된 것이 많아 이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그러므로 상형토기를 일관된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짓기보다는 실용용기로부터 장식용, 부장용 등 제작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들 토기는 크게 인물형·기물형·동물형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인물상이라고는 해도 단독으로의 인물이 아니라 말을 타거나 배를 젓는 등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한 쌍과 인물주형상(人物舟形像) 한 쌍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출토지·출토상태·반출유물이 확실한 것은 드문 예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것은 유리그릇·금동제 함·등잔모양토기·긴목항아리〔長頸壺〕·굽다리접시·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옥제 목걸이·칼 등과 함께 무덤방〔墓室〕을 덮은 위에 부장한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봉토를 덮기 전에 장례의식을 행하고 기명(器皿)들을 묻었다고 해석된다. 완전하게 착장한 말을 타고 있는 두 인물은 복식이나 마구(馬具)의 형태로 보아 주종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함께 출토된 배토기〔舟形土器〕위에 앉아 노를 젓는 인물은 큼직한 코와 크게 찢어진 두 눈, 그리고 두 귀가 유별나게 넓다. 과장되게 성기(性器)를 나타냄으로써 나체의 인물, 즉 말탄사람보다 신분이 낮은 계급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혀를 빼물고 있는 입모양에서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의 자태가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말〔馬〕은 고대 중국에서는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다섯 동물 중의 하나였다. 또 말이나 배〔舟〕는 고대인에게 중요한 수송수단의 하나였다. 이로 볼 때, 무덤 속에 넣는 배는 죽은 이를 저세상에 태워 보낸다는 뜻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말 탄 주인과 하복(下僕)에 있어서도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 장례의식에 쓰였다고 생각되는 등잔형토기가 부장된 것을 보면 공주 무령왕릉에서 등잔용기가 출토된 경우와 매우 유사한 성격을 가졌다고 해석된다.
말토기〔馬形土器〕: 인물형토기에서 소개한 금령총 출토의 말탄사람토기〔騎馬人物形土器〕에 보이는 말은 마구를 고루 갖추고 있어서, 고대 마구 연구에도 큰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밖에도 착장한 말이 투창(透窓)이 있는 그릇받침〔器臺〕위에 놓이거나 네모진 받침대 위에 놓이는데, 등 위가 뚫린 중공형식의 말토기가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대체로 흑갈색의 자연유(自然釉)가 덮이거나 회색계통의 토기로 금령총 출토의 말보다는 훨씬 솜씨나 세부묘사가 뒤지고 출토지도 확실하지 않다.
오리토기〔鴨形土器〕: 달성·안동·창녕 등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진 오리토기가 상당량 알려져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창녕지방 출토라고 전하는 유물이 있다.
4개의 사각창(四角窓)이 있는 그릇받침을 발 대신으로 하고 있는 오리토기 한 쌍은 꽁지 쪽에 구멍이 뚫리고 등 위에 원통형으로 솟아 있는 구멍이 있어 몸체는 역시 중공형식이 된다. 통통한 몸체에 약간 숙인 머리에는 오리의 독특한 부리가 섬세하게 표현되고 눈, 코가 잘 나타나고 있다. 살짝 치켜올린 꼬리가 잘려져 구멍이 뚫리고는 있지만,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그대로 잘 연상된다. 따로 만들어 등에 붙인 두 날개는 앙증맞을 정도로 귀엽고, 목에는 둥근 띠로 목걸이를 하고 있어서 집에서 기르던 오리임이 잘 드러나고 있다.
솜씨는 약간 뒤지나 이와 비슷한 형식의 오리토기가 이 밖에도 호암미술관에 여러 점이 있다. 그리고 투창이 이중으로 된 형식의 그릇받침 위에 올려진 오리가 부산시립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물오리·물새 등은 강가의 주민에게는 좋은 식품원(食品源)이 되고 있었으며, 또 새·물새 등은 고대사회에서 사람의 영혼을 저세상에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고 해석되어왔다. 따라서 새의 뼈나 깃이 무덤 속에 부장되고 중국의 토용에도 새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물오리·새 등이 무덤에 부장되는 이유나 성격을 밝혀주며, 한편으로는 물오리나 새를 본뜬 토기의 성격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 한편으로는 출토상태가 알려져 있지 않아 잘라서 말하기는 어려우나, 물과 관계된 어떤 의식, 예컨대 기우(祈雨) 등의 의례행사와의 관련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유물 중에는 토기나 금속제의 그릇뚜껑에 새를 손잡이로 표현한 것이 있고, 무령왕릉의 베개〔頭枕〕에 두 마리의 새가 얹혀 있는 것도 모두 비슷한 성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고구려조에는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어 이것을 부경(桴京)이라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이 집토기도 창고건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이 제례용·부장용이었다면, 항상 곡식이 가득하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뜻일 것이며, 또 저세상에 가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염원하는 마음이 담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집토기는 경상남도 합천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간결한 네 다리를 네모진 띠로 받치고 네 다리 위에 덩그렇게 앉은 작은 집은 굴뚝모양의 귀때도 간결하다.
한편, 일본의 와카야마시〔和歌山市〕에서 출토된 집토기는 받침이 없이 네 다리가 있고 그 위에 집이 있으며, 굴뚝모양의 귀때는 나팔꽃처럼 벌어져 있고 집의 몸체에 구멍이 있어 특이하다. 그런데 이 유물은 가야지역 공통의 반출유물에 비추어 가야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보다 큰 편에 속하는 집토기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둥실하게 집채를 만들어 나타낸 동체(胴體)의 위쪽에 맞배지붕을 얹은 형태이며, 지붕 한가운데에 굴뚝을 뜻하는 귀때부분이 있어 역시 중공이며 몸체에는 선각으로 문과 창문을 표현하고 있다. 또 시대가 약간 내려와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뼈단지〔骨壺〕의 외함(外函) 중에는 높이 40㎝를 넘는 크기의 집토기가 있다. 기왓골이 잘 나타난 팔작지붕 벽 한쪽에 정방형의 문이 있고, 문장부를 끼는 구멍이 있는 문둔테 4개가 잘 남아 있다. 덧무늬〔隆起文〕로 집 축대를 표현하고 벽면과 지붕의 합각에는 꽃무늬를 눌러 찍어 나타냈다. 경주 보문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경주 계림로고분의 제25호 독무덤〔甕棺墓〕에서 출토된 것은 살이 촘촘히 있는 두 개의 바퀴 사이에 적재함이 있고, 적재함의 위와 양옆은 막히고 앞쪽은 트였으며, 그 가운데에 긴 이음대가 나와 있다. 이 끝에는 소나 말이 매어져 있었던 것 같다.『양서(梁書)』신라전에는 소에게 수레를 끌게 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수레토기에는 원래 소가 딸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적재함의 바깥쪽에는 짐을 싣는 데 튼튼하도록 띠를 대고 못을 박고 있는데 현재 5줄씩 장식되어 있다. 이 모양은 당시의 쓰임새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한 호암미술관에는 인물이 없는 배토기가 소장되어 있다. 마상이〔獨木舟〕라 해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고 만든 배모양과, 뱃전에 다른 판대기를 대었을 것 같은 형식의 두 가지가 전한다. 배나 수레는 모두 고대의 좋은 수송수단에서 뺄 수 없는 기구로, 무덤 속에 넣어진 배는 죽은 이를 저세상에 태워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지금까지 이형토기로 불려온 많은 양의 토기 중에는 신발모양토기가 독특하다. 코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뒤쪽은 발을 꿸 때 잡을 수 있는 고리까지 표현되고 있으며, 신발의 앞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발등에서 얽어 맬 수 있도록 한 모양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호암미술관 소장품으로 진흙색 바탕에 일부 회색의 자연유가 덮여 있다. 가야지방 출토품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 밖에 짚신장식 형태의 받침이 둥근 그릇받침에 놓이고, 그 짚신 속에 잔이 놓인 모양의 토기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부산직할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정식학술조사에 의해 출토된 가야토기의 한 예가 말머리뿔잔〔馬頭角杯〕한 쌍이다. 이는 이 뿔잔의 아래쪽에 말머리를 조각한 것으로 발을 붙여 안정되게 만들었다. 말머리는 간결하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상형토기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상형토기들은 각종 껴묻거리와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 장송의례(葬送儀禮)의 일면을 살필 수 있고 예술공예품으로서의 상징성 등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상형토기를 통해서 삼국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내세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