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차홀(車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의 영토가 된 뒤 한주(漢州) 관할의 수성군(水城郡: 지금의 水原)의 4개 속현 중 하나가 되었다. 고려 태조 때 용성현(龍城縣)으로 고쳤고, 그 뒤의 기록이 없어 고려 초기 수원의 장안면(長安面)이 된 것으로 본다.
지형상으로는 진위천(振威川: 조선시대는 奈川) 유역의 안성평야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물산이 풍족하였으나, 아산만에 가까이 있어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1358년(공민왕 7) 왜구가 침입하였고, 1372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여 양광도순문사(楊廣道巡問使) 조천보(趙天輔)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이 지역에 조운(漕運)이 발달하여 내륙지방의 물자를 수송하는 창(倉)이 많이 발달하였다. 교통상으로는 직산과 남양을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고, 계두포(雞頭浦)ㆍ노산포(魯山浦)ㆍ갱관포(亢串浦)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다.
상홀의 지명유래는 상(上)이 정수리의 수리를 뜻하는데 이것이 수레의 차홀(車忽)로 바뀌어 ‘큰 마을’ 또는 ‘우두머리 성’이라는 데서 나왔다. 비옥한 평야지역에 있어 예로부터 이곳에 큰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