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생·화(和)·우(竽) 또는 이들을 통틀어 생황이라 한다. 악기 분류법에 의하면 생황은 포부(匏部)에 들며, 공명악기(空鳴樂器)의 일종이다. 조선 초기 악기의 몸통에 꽂힌 죽관(竹管)의 수에 따라서 화(13관)·생(17관)·우(36관)로 구분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17관의 생황이 주로 쓰이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우리 나라의 생황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셍(sheng)이나 일본의 쇼(sho)와 같은 계통에 들며, 서양에서는 입으로 부는 오르간(mouth organ)으로 알려져 있다. 《수서 隋書》·《당서 唐書》에 의하면, 생황은 고구려음악과 백제음악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악기가 통일신라시대에도 중요한 악기의 하나이었음을 상원사의 범종의 비천상에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생황은 생 또는 우로 불렸고, 1076년(문종 30)의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에 생업사(笙業師) 1명이 있어 생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114년(예종 9) 포생(匏笙)과 1116년 소생(巢笙)·화생(和笙)·우생(竽笙)이 송나라 휘종(徽宗)에게서 고려에 전해진 뒤, 생황은 아악기의 하나로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었다.
1406년(태종 6)명나라 영락(永樂)이 생황을 조선에 보낸 바 있으며, 그 뒤 생황은 세종 때 악기도감에서 제조되었으며, 《악학궤범》 권6에 자세히 그림을 넣어 풀이되어 있다. 생황은 조선 전기 제례 아악의식의 등가(登歌: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전래된 아악 연주 형태의 하나. 노래와 현악을 주로 하는 주악 형식임)와 헌가(軒架:대례나 대제 때 대청 아래에서 아뢰는 풍악. 鍾鼓를 걸어놓고 관현을 갖추어 침)에서 다른 아악기들과 함께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중요한 악기로 쓰였다.
임진왜란 이후 생황은 우리 나라에서 제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구해다가 쓰기도 하였으며, 19세기경부터 궁중 밖에서도 연주되었으니, 이러한 음악을 담은 악보가 서유구(徐有榘)의 《유예지 遊藝志》의 생황자보이다.
생황의 전통은 일제시대 김계선(金桂善)·박창균(朴昌均)에 의해서 전승되었고, 현재 국립국악원김태섭(金泰燮)에게 이어졌다. 생황의 몸통은 본래 바가지[匏]로 제조되었고, 몸통 위에 가느다란 죽관이 꼽혔다. 각 죽관의 밑에 하모니카의 서 같은 쇠청[金葉, reed]이 달려 있는데, 몸통의 취구에 숨을 내쉬거나 들이마실 때 모두 이 쇠청이 울려서 소리를 낸다. 따라서, 생황의 음색은 하모니카의 화음소리처럼 맑고도 부드러워 현재도 단소와 함께 이중주로 쓰인다.
생황의 음역은 13관의 화의 경우 12율의 한 옥타브였고, 생과 우는 12율과 4청성을 내었다. 《악학궤범》과 《유예지》의 생황 산형(散形)에 의하면, 17관의 생황은 [그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