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동암(東菴). 대구 출신. 서봉기(徐鳳基)의 아들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9인결사대’를 조직, 민족의 강경한 반일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서울에 있던 각국 공사에게 돌린 뒤 전원이 할복자살을 계획했던 세칭 ‘9공사사건’을 일으켰다.
1913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 등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사업을 했으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 3월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해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1921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이 청원서에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4년 『농림(農林)』 과 『민중운동(衆運動)』 이란 잡지를 발행하고, 흑우회(黑友會) 계통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립하여 총무로 선임되었고,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의원에 취임하였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立法議院)의 민선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발기하여 최초의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1950년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1956년 진보당(進步黨) 창당에 참가해 간부로 활동하고, 1960년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을 창당해 대표총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60년 제5대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큰 활동을 못하였다.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統一大衆黨)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