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옥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이다.
동이전의 고구려조에 “처음 말로써 혼인을 정하고 다음에 여자의 집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지어 서옥이라 부르며, 저녁에 사위가 여자집에 와서 문밖에서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무릎 꿇고 절하면서 여자와 같이 잘 것을 세 번 원하면 여자의 부모는 이것을 듣고 소옥에서 같이 잘 것을 허가한다. 남자는 다음날 떠날 때 전백(錢帛)을 놓고 간다. 여자는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해야 비로소 남자의 집에 살러 간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고구려의 서옥제라 하며 이에 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장승두(張承斗)는 이를 데릴사위제도로 보았으며, 손진태(孫晉泰)는 봉사혼(奉仕婚)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서옥제가 여자집에 세워진 서옥에 남자가 와서 자고 가며, 여자가 자녀를 낳아 자녀가 성장한 뒤 남자의 집에 살러 가기 때문에 데릴사위제는 아닌 게 분명하다.
또한, 봉사혼이란 남자가 여자집에서 일정기간 머무르면서 노력봉사하는 것이지만, 고구려의 서옥제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의 서옥은 최근까지 구식 혼인식에서 볼 수 있었던 해묵이풍속의 원형이라 생각된다.
해묵이란 혼인식을 올린 여자가 자기 집에 머물러 있고 남자가 몇 번이고 재행(再行)걸음을 한 뒤 해를 지나 별도로 날을 잡아 남자집에 살러 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서옥과 가장 유사한 혼인풍속이 해묵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