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고려시대 이래 향리의 중심층을 지칭했던 기서지원(記書之員)인 ‘기관(記官)’이 조선의 개국과 함께 개칭되면서 비롯되었다.
중앙 각 관아의 서원은 1466년(세조 12) 1월에 재정 궁핍 등으로 인한 관제 개혁에 수반되어 상급서리(上級胥吏)는 녹사(錄事)로, 하급서리는 서리로 각각 단일화하는 조치로 소멸되었다. 이와는 달리 지방 각 관아의 서원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중앙의 서원은 서리(書吏)가 없는 병조·형조·승정원·교서관·장악서·봉상시 등에 배속되어 사환(使喚) 등 잡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로 문서 작성·열자(列字)·회계·공사 전달 등의 행정 사무를 담당하였다.
다른 관아에 배속된 연리(掾吏)·서리(書吏)·영리(令吏)·전리(典吏)·사리(司吏)와 함께 하급서리나 이전(吏典), 또는 고려 이래의 궁관(宮官)·시위 군사와 조선 개국 이래의 녹사·지인(知印) 및 별시위·내금위·충순위 등에 소속된 군사와 함께 성중관(成衆官)으로 통칭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양인인 방민(坊民)에게 하급서리를 선발하는 이과(吏科) 즉, 서(書)·산(算)·율(律)의 시험을 보게 하여 충원되었다. 그러나 늦어도 1446년(세종 28) 이전부터는 이과의 폐지와 함께 무시험으로 충원되었다.
또 이들은 근무에 대한 급부로 비록 산계(散階)이기는 하나 종9품∼종7품의 품계를 획득하였다. 10∼20여 년의 근무 기간을 마치면, 대부분 산계만을 가지고 거관(去官)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상급서리에 입속(入屬)하거나 영직(影職) 또는 7∼9품의 문무반 실직에 제수되어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을 도모하거나 실현하였다.
그 밖에 이들의 승자(陞資)는 당초 품계에 따라 순차로 되다가 그 뒤 순자법(循資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1444년에 “서원은 동반(문반)에 비할 바가 아니니 순자법을 쓰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적과 함께 품계에 따라 승자하는 것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지방 서원은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군·현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수령과 육방아전의 지시를 받으면서 세금 징수·손실답험(損實踏驗) 등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지방의 양인 중에서 충원되었다. 각 관아별 배속 인원은 처음에는 제 읍 수령이 임의로 정하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에 “정액이 없음을 기화로 지방 수령이 한량인민(閑良人民)을 많이 점유해 마구 부린다.”는 지적에 따라 부는 50인, 대도호부·목·도호부는 40인, 군은 30인, 현은 20인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이것을 바탕으로 부는 34인, 대도호부·목은 30인, 도호부는 26인, 군은 22인, 현은 18인으로 명문화되었으며, 이 인원이 한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중앙의 서원과 달리 산계, 상급서리 배속, 영직, 실직 등과는 유리된 만큼 천역시되면서 기피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세금 징수·손실답험사를 수행하면서 불법을 자행함은 물론 사리를 도모하였다.”고 함과 같이 지방 행정의 말단에서 일반 백성을 침해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