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미술회 ()

회화
단체
1911년에 설립되었던 미술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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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1년에 설립되었던 미술교육기관.
연원 및 변천

서화미술회의 설립은 전통서화의 계승과 후진양성을 위한 미술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문인화가 윤영기(尹永基)가 1911년 3월에 서울 중학동에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을 마련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경성서화미술원은 설립추진과정에서 이완용(李完用), 조중응(趙重應), 조민희(趙民熙) 등 일부 친일파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으며, 설립 이후에는 이왕가(李王家)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따라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경성서화미술원의 실질적인 운영을 위하여 이완용을 회장으로 하는 서화미술회가 조직된 것이다. 이후 경성서화미술원과 더불어 윤영기는 퇴진하였고 서화미술회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근대적 성격을 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이다. 서화미술회는 서과(書科)와 화과(畵科)의 두 과로 나누어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수업연한은 서화전공별로 3년이었고,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았으며, 정규학생 이외에도 단기적인 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있었다.

초기의 강습소는 백목다리(지금의 신문로) 근처에 있던 왕실 소유의 큰 한옥건물이었으나, 1915년에 관철동으로 옮겨졌다. 교수진은 당시 서화계의 대가였던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을 중심으로 강진희(姜璡熙), 정대유(丁大有), 김응원(金應元), 강필주(姜弼周), 이도영(李道榮) 등이었다.

이들의 교육방법은 고법전수식(古法傳授式)으로, 학생들은 선생들이 수묵화와 채색화의 여러 체본(體本)들을 그려주면 그것을 일일이 임모(臨模)한다든가 또는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이따금 실물사생을 하였으나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고, 주로 옛 화법에 의해 기초훈련을 쌓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서화미술회 출신의 대표적 화가로는 제1기생으로 오일영(吳一英), 이용우(李用雨), 제2기생으로 김은호(金殷鎬), 제3기생으로 박승무(朴勝武), 제4기생으로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최우석(崔禹錫)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20년 이후 한국근대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되었으며, 이들에게 화풍상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조석진과 안중식이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1998)
『근대한국미술의 전개』(이구열, 열화당, 1977)
『한국현대미술사-동양화-』(국립현대미술관, 1976)
『한국근대미술연구』(이경성, 동화출판공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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