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낙산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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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낙산리 고분군
구미 낙산리 고분군
고대사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 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낙산동고분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구미 낙산리 고분군(龜尾 洛山里 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90년 10월 31일 지정)
소재지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98-4번지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 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1990년 10월 3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229,245㎡이다. 구미시 일대의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는 낙동강을 끼고 동·서 양안에 많은 고분군들이 분포한다. 그 중에서도 강의 동쪽편에 해당하는 해평면(海平面) 일대가 고분군 분포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대구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 방향으로 구미시 해평을 지나 일선교에 이르는 도로의 좌우에 대형봉토분(大型封土墳)들이 분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구미 낙산동고분군이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동측의 냉산(해발 691.1m)에서 서측으로 낙동강을 향해 뻗은 구릉들 가운데 하나의 말단부 가까이로 이 구릉의 말미는 낙동강과 접해 있다. 낙산동고분군은 3개의 군집으로 나누어지는데 25번 국도의 서편에 낙동강을 향해 말발굽 모양으로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는 것을 월파정산(月波亭山) 고분군, 그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편의 북서에서 동남으로 길게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고 있는 것을 정묘산(鄭墓山)고분군, 정묘산고분군과 작은 계곡을 두고 북쪽에 남북으로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는 것을 불로산(不老山)고분군이라 부르고 있다.

내용

낙산동고분군 가운데 월파정산에서 확인되는 봉토분은 모두 81기이다. 이 고분들의 봉토는 대부분 원형의 단독분이나 표형분도 확인되었다. 고분들은 말발굽 모양의 능선 상부를 따라서는 대형분이, 능선의 사면을 따라서는 소형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봉토의 크기는 대형분은 직경, 높이가 15×4m 정도이고, 대부분은 10×2m 내외인데, 특히 작은 것은 5×0.3m 내외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대형분의 수는 약 10여 기가 된다.

이 고분군에 대해서는 1915년 일제강점기에 흑판승미(黑板勝美)에 의하여 하나의 봉토분에 대한 시굴조사가 시행된 바 있다. 또 1917년 조선고적조사위원회는 구미지역 고분군의 분포를 조사하면서 그 중 해평면 낙산동 28호분과 105호분을 발굴조사하고 간단한 보고를 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분은 높이 9m의 대형분으로 그 내부는 길이 12m의 장방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이 남-북을 장축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돌덧널의 내부에는 남과 북에 각각 1인을 매장하여 2인을 합장하였고 여기에서는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보고가 없어 조사내용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합장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고분은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구미지역의 고분군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많은 고분군들이 도굴되고 훼손되었으나, 1987년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선산지역 고분군의 분포가 재조사되고 낙산동 일대 고분군의 두 지점이 발굴 조사되었다. 즉 이 고분군의 북쪽 주변이 택지조성지구로 지정되어 1987년 효성여자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이 때에는 봉토가 남아 있지 않은 20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이 고분들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5기, 독널무덤(甕棺墓) 1기, 덧널무덤(木槨墓) 12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2기 등으로 분류된다. 덧널무덤 가운데는 돌을 깔아 바닥을 마련한 것이 있었고, 돌덧널 가운데는 주부곽식도 1기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굽다리접시(高杯), 손잡이잔, 항아리, 화로모양토기, 바리모양그릇받침 등의 토기류와 쇠손칼(鐵刀子), 쇠화살촉(鐵鏃),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등의 철기류가 있다.

그리고 1989년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6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효성여자대학교에 의해서 조사된 고분들의 봉토는 대부분 단일원분(單一圓墳)이나 표형분(瓢形墳, 38호분)과 다곽식의 다장분(多葬墳, 37호분)도 있었다. 비교적 대형의 봉토분은 둘레돌(護石)을 돌렸고 내부에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이 구축되어 있었으나, 소형의 봉토분에서는 둘레돌이 발견되지 않았고 내부에는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이 축조되어 있었다. 이들 봉토분들 사이사이에서도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독널무덤, 움무덤(土壙墓)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봉토분에서 조사된 돌덧널은 평면형태가 세장(細長)한 장방형 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 지상에 축조하였고, 양 장벽을 위로 올라가며 내경되게 쌓고 위에는 돌뚜껑을 하였다. 돌덧널들의 장축은 대부분 동-서를 취하였으나 않았을 취한 것도 1기(표형분인 38호분의 동곽) 있다. 그리고 앞트기식의 경우 입구는 동-서축의 경우 서단벽에 내는 것이 많았고, 남-북향의 것은 남단벽에 두었다. 돌덧널의 바닥에는 깬돌(割石)을 깔고 그 위에 자갈을 깔아 주검받침(屍床)을 마련했다. 이러한 봉토분 대부분의 둘레돌 외부나 봉분 기저에는 제사유구로 보이는 부대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가는귀고리(金製細環耳飾), 유리목걸이(琉璃頸飾) 등의 장신구류, 발걸이(鐙子), 띠고리(교具), 십자형식금구(十字型飾金具) 등의 철제마구류, 쇠도끼(鐵斧) 등의 철제농공구류와 다종다양한 토기류가 있다.

낙산동고분군 전체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들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하여도 205기에 달하고 있는데 봉토가 유실되거나 고분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훨씬 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의 저경(底徑)이 20m에 가까운 대형분과 10m 남짓한 중형봉토분 그리고 그 이하인 소형봉토분이 이 구릉 위에만 200여 기 분포하여 지표조사자에 의하여 205호분까지 일련번호가 부여되었다. 이중에서 서로 인접한 22·28·31·32·37·38호분 등 6기의 봉토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31호분과 37호분은 소형봉토분에 속하며 내부의 매장주체부는 장방형의 수혈식석곽이다. 28호분과 32호분은 봉분의 저경이 10m 정도되는 중형봉토분이고 매장주체부는 길이 5∼6m 정도되는 횡구식석실분이다. 낙산동고분군에서는 대형분에 속하는 22호분은 봉분의 저경이 15m 정도인데 38호분은 저경 20m의 원분(圓墳) 2개가 맞대어진 표형분(瓢形墳)이다. 이 2기의 대형분에서 노출된 3개의 매장주체부는 모두 횡구식석실분이다.

구미지역 대형분의 구조적인 특징은 38호분을 통해서 잘 살펴볼 수 있다. 38호분은 2개의 봉분이 동서로 결합되어 있어 각각 동분과 서분으로 불린다. 매장주체부의 장축방향은 동분이 남-북향에 가깝고 서분이 동-서축에 가깝게 되어 있어 ‘T’자형에 접근하는 배치이다. 두 매장주체부는 물론이고 다른 낙산동의 횡구식석실들도 평면형이나 축조방법이 거의 동일하다. 모두 세장방형의 평면형이고 석실의 4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내경(內傾)하게 쌓아 올리고 거대한 판석(板石)을 내려누르듯 덮어서 구조적인 안정성을 기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38호 서분의 경우 석실의 바닥 평면은 길이와 폭이 9.0×1.5m인데 비해 상부는 8.6×0.6m에 불과하다. 단면상으로 본다면 긴 사다리꼴이다. 입구(橫口部)의 위치는 장축방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특별한 방향성은 없고 단벽(短壁) 전체가 입구로 이용된다.

대부분의 유구가 도굴이 심하여 유물의 내용이나 부장양상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다만 일종의 토기제사유구(土器祭祀遺構)로서 원형의 둘레돌(護石) 외곽에 소형토기부장구덩이(小形土器副葬坑)를 마련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출토된 유물은 극소한 편으로, 등잔형토기(燈盞形土器)와 같은 이형토기(異形土器)를 포함한 토기류 외에 특별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된 토기의 양식으로 보아 6기의 고분은 5세기말에서 6세기 전반대에 축조된 듯하다. 토기 양식은 낙동강동안양식토기(洛東江東岸樣式土器)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고, 경주지역이나 가까운 대구, 칠곡, 의성 등지와는 미세한 기형(器形)의 차이가 관찰되어 구미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대형봉토분이 군집된 5∼6세기대 중심고분군과는 별도로 낙산동 유적의 가장 북편에 속하는 구릉지대에서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낙동강에 거의 접한 능선상에 입지한 고분군으로, 여기에서는 대체로 4세기부터 5세기초에 걸친 덧널무덤들이 조사되었다. 이들은 대형봉토분군과는 불과 1㎞ 정도 떨어져 있고 고분군이 분포한 구릉들이 서로 연접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유적군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고 유적의 형성은 대개 이 지역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장방형의 소형 덧널무덤이 중심인데 4세기 전반경의 이른 시기의 유구는 항아리(短頸壺)류들이 주로 출토되었고 특별한 부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4세기 후반경의 유구에서는 납작한 자갈을 덧널 바닥에 까는 부석시설(敷石施設)이 나타나고 5세기 초에 접어들어 덧널과 무덤구덩이 벽의 사이에 돌을 채우는 방식도 나타난다. 특히 5세기 초로 연대가 추정되는 10호분의 경우 매장주체부가 점토와 자갈을 이용하여 덧널(墓槨)을 만드는 이른 바 역석점토곽(礫石粘土槨)이다. 공사로 딸린덧널(副槨)이 결실되었지만 주부곽식의 구조이고 무덤구덩이(墓壙) 바닥을 파고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를 매납하는 독특한 방식의 유물부장양상도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이처럼 월파정산을 포함한 낙산동고분군은 3∼4세기대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5∼6세기대에는 횡구식을 위주로 한 고총군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영남각지의 덧널 계열의 매장주체부들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들어서면서 다양하게 변형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구미 낙산동고분군의 늦은 시기 덧널무덤들도 그러한 지역적 변형의 하나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있는 고분들의 크기는 낙동강을 따라 좌우에 분포한 지역별 고총군들과 비견되는 것으로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구미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집단의 최고 지배자들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선산 낙산동고분의 연구」(이은창, 『영남고고학보』10, 영남고고학회, 1992)
『낙산동 월파정산 고분군 발굴조사개보』(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 1990)
「선산 낙산동 고분군」(이은창, 제33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90)
『선산낙산동고분군지표조사보고』(이은창,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 1989)
『선산낙산동고분군발굴조사보고』(이은창,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 1988)
「선산 가야고분의 연구: 낙산동 고분군 발굴조사를 중심으로」(이성주, 『영남고고학』4, 영남고고학회, 1987)
『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善山郡-』(今西龍, 朝鮮總督府,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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