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의궤는 총 93종이 있다.
『선원계보기략』은 『선원보략』 또는 『선원록』으로 약칭되기도 하는 바, 이 족보는 숙종 때 처음 간행되어 왕이 새로 즉위하든가, 기타 다르게 수정 및 보완할 사안(事案)이 발생할 경우, 중교(重校) 또는 보간(補刊)을 거듭하였다.
『선원록』 수정에 관한 의궤 중 최초의 것으로는 1679년(숙종 5)부터 그 이듬해인 1680년까지의 『선원록』의 이정(釐正)에 관한 기록으로 『선원록이정청의궤(璿源錄釐正廳儀軌)』 3책이 있다.
그 체재 및 내용을 보면, 상책에 전교(傳校)·계사질(啓辭秩)·품목질(稟目秩)·이문(移文) 및 첩정질(牒呈秩)·감결질(甘結秩) 등이 있고, 중책에 일방(一房)·이방(二房), 하책에 삼방(三房)에서 육방(六房)까지의 변이(辨異) 및 품목질 등을 수록하고 있다.
상책의 「전교·계사질」을 보면 당시의 『선원록』에 착교(錯校)·계란(啓亂)이 많으므로 보학(譜學)에 정통한 사람에게 맡겨 제가(諸家)의 족보와 대조, 고증하여 틀린 부분을 수정하자는 종친들의 발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선원록』의 수정을 결정한 기사가 있다. 또한 『선원록』 수정 시의 응행 절목(應行節目)과 편수 체재에 대해 언급한 기사가 있다.
한편, 1680년 10월에는 『선원록』 50권이 이루어졌으나, 서출(庶出)을 적자(嫡子)로 기록하는 것과 같은 모록(冒錄)의 문제가 제기되자, 일단 이정된 『선원록』을 다시 선원록 교정청을 개설, 『선원록』의 수정 업무를 담당하도록 결정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결정에 따라 선원록교정청에서 수정한 내용들은 1680년부터 1681년까지의 『선원록』 교정에 관한 기록인 『선원록교정청의궤(璿源錄校正廳儀軌)』에 나타난다.
이정청별단(釐正廳別單)에 수록된 역원(役員)의 명단을 보면, 도제조(都提調)에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하여 제조 2인, 부제조 2인, 전제조(前提調) 3인, 도청(都廳) 2인, 전도청 3인, 낭청(郎廳) 16인, 전낭청 5인, 서사관(書寫官) 27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중·하책에는 『선원록』의 이정을 분담한 각방(各房)의 역원 명 및 작업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수정할 내용의 변이 및 소요 물목(所要物目)이 수록되어 있다.
『선원록』의 수정에 관한 의궤는 그 명칭이 다양하였으나 대략 1764년(영조 40)에 만들어진 의궤부터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로 고정되어 1907년까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원록』 수정과 간행의 소관 부서는 당초에 이정청이었으나 1680년 이후부터 교정청을 수시로 별설(別設)하여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1757년 수정 시부터는 종부시(宗簿寺)에서 담당하기도 하였고, 1864년(고종 1) 종부시가 종친부(宗親府)에 합쳐진 이후부터는 종친부의 주관으로 『선원록』 수정 업무를 수행하였다.
『선원보략수정의궤』의 체재 및 구성 면에서 볼 때 보다 종합된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1783년(정조 7)에 만들어진 의궤부터이다. 이 의궤의 목록을 보면, 좌목(座目)·계사·서계(書啓)·상전(賞典)·봉안(奉安)·반사(頒賜)·변이·이문·내관(來關)·감결 등의 순으로 종전보다 체계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좌목」에 수록된 역원의 숫자도 축소되는 한편, 편제가 실무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대부분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