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태조는 5년(1396) 2월 수도 한양에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목멱산(木覓山)·낙타산(駱駝山)을 연결해 연장 5만 9,500척(약 18㎞)의 도성을 축조하였다. 이 도성의 바깥쪽에서부터 10리까지를 서울의 관할 구역으로 하고 이곳을 성저 10리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 서울은 오부(五部)와 성저 10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모두 한성부(漢城府)의 관할에 속하였다. 성저 10리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의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으로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의 덕수원(德水院)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북한산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도성 안을 성안, 도성 밖을 성밖이라고 했는데, 성저라고도 하였다. 백성들은 대체로 도성 안에 거주했고, 성밖 즉 성저에는 제한된 지역에만 거주하였다. 즉 동북쪽으로 통하는 흥인문(興仁門) 밖의 도로변, 서북쪽으로 통하는 돈의문(敦義門) 밖의 도로변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거주하였다.
한편 성저 10리 안의 동쪽·서쪽·남쪽 지역에 보제원(普濟院)·홍제원(洪濟院)·제천정(濟天亭)·사평원(沙坪院) 등 원과 정이 있었다. 이러한 원(院)과 정(亭)은 세조가 승려들 중에 재간이 있는 자에게 명해 세운 것들이다.
보제원은 동대문 밖 3리 지점에 위치하며, 3월 3일과 9월 9일에 기로(耆老 : 70이 넘은 관료)와 재추(宰樞)를 위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그리고 홍제원은 사현(沙峴)의 북쪽 들에 있었는데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 이 원에 머물러 옷을 바꾸어 입었다.
제천정은 한강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한강을 유람하는 중국 사신은 맨 먼저 이 누(樓)에 올랐으며, 또한 고관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던 곳이다. 사평원은 한강의 남쪽 모래 언덕에 있었는데 날이 저물어 한강을 건너지 못한 나그네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이러한 성저 안의 원과 정은 모두 한성부에서 자세히 살펴 수리했으며, 특히 보제원과 홍제원에는 전(田) 2결(結) 50부(負)를 지급하였다. 이 밖에 성저 지역에는 남산의 남쪽에 이태원(梨泰院), 전관교(箭串橋)의 서북쪽에 전관원(箭串院)이 있었다.
1428년(세종 10)에 한성의 호구와 인구를 보면 성안에 1만 6,921호 10만 3,328명의 인구가 거주했으며, 성저 10리에 1,601호 6,044명이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