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성산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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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구덩식돌방무덤 ·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성주 성산동 고분군(星州 星山洞 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산6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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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구덩식돌방무덤 ·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성주읍의 동남쪽 배경을 이루고 있는 성산으로부터 북쪽과 서쪽으로 뻗어나간 능선의 정상부와 산록경사면에 대형봉토분들이 밀집되어 성산동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성산리의 남쪽에 있는 구릉의 척량부(脊梁部)에 연주상(連珠狀)으로 축조된 원형봉토분군(圓形封土墳群)이다.

1918년에 일본인 하마다(浜田耕作)와 우메하라(梅原末治)에 의해 제1·2·6호분이, 1920년에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해 성산동대분(星山洞大墳)·팔도분(八桃墳)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1986년 10∼12월에 계명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내용

제1호분은 구릉의 능선 말단부에 위치한 원분으로, 봉토는 높이 3.6m, 지름 13.6m이다. 매장시설은 할석으로 쌓은 장방형돌방이며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돌방은 길이 3.6m, 너비 1.3m, 높이 1.6m이다. 동쪽 벽을 제외한 세 벽은 정연하게 쌓여져 있으므로 동쪽 벽을 입구로 한 구덩계앞트기식돌방무덤〔竪穴系橫口式石室墳〕인 것 같다. 돌방의 바닥에는 석괴를 2, 3단 쌓은 뒤 그 위에 작은 할석을 깔았으며, 천장은 큰 판석형돌 4매를 가로로 걸쳤다. 돌방의 내부에는 동쪽에서부터 토기류와 쇠도끼·은제관장식과 금제귀걸이, 은제허리띠·고리자루칼〔環頭大刀〕의 순으로 놓여 있었고, 서쪽 벽의 주위에는 토기류가 부장되어 있었다. 유물의 배치 및 두개골의 출토위치로 보면 동쪽으로 머리를 둔 것 같다. 그 밖에 돌방의 사방에서 창·준·화살촉·화살통의 부속구로 보이는 은제품·곱은옥형 금구와 동환(銅環)이 출토되었다.

제2호분은 제1호분의 바로 위쪽에 위치한 원분으로, 봉토는 높이 6m, 지름 27m이다. 매장시설은 구덩식돌방이고 장축은 남북방향이다. 돌방의 규모는 길이 3.4m, 너비 1.7m, 높이 1.6m이며, 바닥에 할석을 3, 4벌 깔았다. 돌방 주위에는 돌무지시설이 있었다. 돌방의 동쪽 벽에서 2m 정도 떨어진 곳에 제1부속돌덧널이 있었고, 이보다 약간 높은 곳에 제2부속돌덧널이 있었다. 으뜸돌방은 도굴을 당해 출토유물이 빈약한 편이나 남쪽 벽과 북쪽 벽 일대에서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으뜸돌방 내부에서 관못·손칼〔刀子〕·창·도끼·방형밑동쇠〔方形座金具〕·화살통장식·철제은장환두(鐵製銀張環頭) 등이 출토되었다.

제6호분은 제2호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며, 봉분은 높이 3m, 지름 약 9m이다. 돌방의 장축은 남북방향이며, 규모는 길이 3m, 너비 90㎝, 높이 1.8m이다. 돌방의 바닥은 주먹크기의 돌을 깔아놓은 뒤 그 위에 자갈돌을 2, 3벌 깔았다. 돌방 내부는 도굴을 당해 출토유물이 빈약한 편으로, 북쪽 벽의 일대에서 토기류와 철기류가 약간 출토되었다. 그 중에는 조개가 담겨진 굽다리접시〔高杯〕가 있었다. 성산동대분은 같은 크기의 돌방 2기가 장축을 남북방향으로 해 나란히 축조되었다. 서쪽에 있는 돌방이 으뜸덧널〔主槨〕이며 동쪽의 것은 딸린덧널〔副槨〕이다. 으뜸덧널의 규모는 길이 4m, 너비 1.5m, 높이 1.5m이다. 딸린덧널에는 약 300여 점의 토기만이 부장되어 있었다. 팔도분은 길이 2.85m, 너비 89㎝, 높이 1.04m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돌방의 긴 벽에 붙여 널받침〔棺臺〕을 설치하였다.

1988년도 계명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져 성주지역 중심고분군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당초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주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1·2·3호 등 순차적으로 고분의 호수가 부여되었으며 나머지 봉토분들은 북쪽 경사면 일대에 분포해 있었다. 계명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된 고분은 북쪽 경사면에 축조된 봉토분으로 38·39·57·58·59호분 등 모두 5기이다. 5기의 고분 모두 원형의 봉토 안에 규모가 큰 으뜸덧널(主槨)이 가운데 자리잡고 보다 소규모의 딸린덧널(副槨)이 덧붙여진 주부곽식(主副槨式)이다. 58호분의 경우 다른 고분과는 달리 경사면 위쪽에 둘레돌(護石)을 쌓아놓았고 으뜸덧널의 뚜껑돌 중앙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석열을 10줄 쌓아놓았다. 봉토의 외곽을 미리 정하고 봉분을 보다 견고하게 축조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돌덧널은 대부분 반지하식으로 축조되었는데 축조방법상 깬돌(割石)만으로 축조한 것과 큰 대판석(大板石)을 이용하고 깬돌로 보강 석축한 것, 2가지로 구분된다. 성산동 고분군에서 매장시설로 사용한 돌덧널은 평면의 폭이 비교적 넓은 장방형(長方形)에 속한다. 돌덧널의 규모는 으뜸덧널의 경우 길이, 너비, 깊이가 3.0∼3.7×1.2∼1.5×1.7m 가량 되고, 딸린덧널(副槨)은 길이 2m 정도에 너비 1m 안팎이다. 돌덧널보다 큰 규모의 무덤구덩이(墓壙)를 마련하고 석벽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빈 공간은 많은 양의 깬돌을 메워 보강하였다. 대판석을 이용하여 돌덧널을 축조한 것으로는 38호분과 58호분의 으뜸덧널이 대표적이다. 대판석을 세워서 돌덧널의 기본틀을 만들고 판석 사이의 빈공간은 역시 깬돌을 쌓아 메웠다. 나머지 고분들은 모두 깬돌만으로 돌덧널을 축조하고 큰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는데 석벽 뒤에 보강적석을 견고하게 함으로써 돌덧널을 잘 지탱하도록 하였다. 딸린덧널에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토기류 중심의 많은 유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순장(殉葬)의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성산동 고분의 딸린덧널들은 순장과 유물부장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낙동강 동안지역의 주부곽식 고분들이 ‘일(日)’자형의 배치를 주로하고 있는데 반해, 성산동 고분은 딸린덧널을 으뜸덧널 측면에 설치한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5기의 고분에서 1,000여 점에 가까운 토기가 출토되어 다른 고분에 비해 토기부장이 우세한 편이다. 그러나 고분의 규모에 비해 관모류를 비롯한 장신구류, 갑옷과 투구류, 장식큰칼류, 및 금속용기나 기타 금공품류는 거의 출토되지 않아 빈약한 편에 속한다. 또한 무덤의 주인공이 안치된 으뜸덧널에 유물이 빈약한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금공품류로서는 특별한 유물없이 철제에 금동장(金銅裝)이나 은장(銀裝)한 고기꼬리모양말띠드리개(魚尾形杏葉)와 심장모양말띠드리개(心葉形杏葉)를 비롯한 마구류 약간과 금제굵은고리귀고리(金製太環耳飾) 등이 출토된 정도이다.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된 토기의 경우 상하교호투창(上下交互透窓)의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와 굽다리목긴항아리(有臺長頸壺)로 보아 ‘낙동강동안양식토기(洛東江東岸樣式土器)’의 전형임을 인정할 수 있지만 5세기 후반경 성주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 뚜껑목긴항아리의 존재는 이른바 ‘고령계토기’의 요소로서 ‘낙동강서안양식’이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토기양식상으로 살필 수 있는 낙동강 동안과 서안, 혹은 신라와 가야의 중간적인 특성은 묘제에도 잘 드러난다. 낙동강 동안지역에서와 같이 세장형(細長形)이 아닌 돌덧널을 축조하였으면서, 하나 이상의 딸린덧널 혹은 순장덧널을 으뜸덧널 옆에 배치하는 낙동강 서안지역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성주성산동고분특별도록전』(계명대학교박물관, 1988)
「성주성산동고분발굴조사개보」(김세기, 『영남고고학(嶺南考古學)』3, 1987)
「慶尙北道星州郡古墳」(浜田耕作·梅原末治, 『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 1922)
『大正八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濱田耕作·梅原末治, 朝鮮總督府, 1922)
『大正六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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