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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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경상남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성주신의 내력을 노래한 서사무가.
이칭
이칭
성조풀이, 성조신가, 가신유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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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성주신의 내력을 노래한 서사무가.
내용

1925년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에 살던 맹인조합장 최순도(崔順道)가 제공한 무가책의 자료를 손진태(孫晋泰)가 그의 저서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1930)에 수록한 것이 유일본이다.

‘성조(城造)풀이’로 되어 있으며, ‘성조신가’ 또는 ‘가신유래가’라고도 한다. 한자와 한글의 혼용으로 쓰여졌고, 4·4조 가사체의 정확한 율조로 다듬어져 있으며 수사가 세련되어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천국 국반왕과 옥진부인은 혼인하여 살다가 사십이 가깝도록 혈육이 없어 부처님께 치성을 드린 뒤 잉태하여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성조라고 짓는다. 성조는 15세가 되었을 때 옥황께 상소하여 솔 씨 서 말 닷 되 칠 홉 오 작을 받아 지하궁 무주공산에 심는다.

성조가 18세 때 황휘궁의 공주 계화씨와 혼인하나 주색에 빠져 아내를 박대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으므로 신하들이 대왕께 주달하여 성조를 황토섬이라는 무인도에 귀양을 보낸다. 성조는 무인도에서 기한(飢寒)이 자심하고 고생이 극심하던 중 혈서로 편지를 써서 청조(靑鳥)에게 매어 계화부인에게 보낸다.

계화부인은 성조의 편지를 받고 시모인 옥진부인에게 말하여 천궁대왕으로 하여금 성조의 귀양을 풀도록 한다. 성조는 무인도에서 돌아와 계화부인과 화목하게 살며 5남5녀를 낳아 키운다.

성조의 나이 70에 이르렀을 때, 10명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시냇가에서 쇠 열닷 말을 일어 내어 온갖 연장을 만들고 무주공산에 심어 두었던 재목을 베어 내어 궁궐 및 백성들의 집을 짓는다. 집 짓기를 마친 성조는 입주 성조신이 되고 계화부인은 몸주 성조신이 되었다. 아들 다섯은 오토지신(五土之神)을 마련하고 딸 다섯은 오방부인(五方夫人)을 마련한다.

이 무가는 왕자라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성조가 혼인하고 부인을 박대한 죄로 시련을 겪은 후에 부부가 재결합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집을 지은 뒤에 가정을 수호하는 신으로 좌정한다는 무속신화이다.

부부의 분리와 재결합을 통하여 가정의 핵심 요소로서 부부의 애정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는 경기 지역의 「성주풀이」(성주본가)와 일치하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부부와 함께 아들과 딸이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솔 씨를 미리 심어 재목을 키우고 쇠를 일어 내어 연장을 만든 뒤 재목을 베어 내어 주거를 이룩한다는 점에서 목재 가옥의 축조 과정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옥의 주신으로서 남신인 성조신과 가옥의 터주신으로서 여신인 성조신, 그리고 오방오토의 남녀신을 의도적으로 균형있게 설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남신과 여신의 조화를 강조하였음이 드러난다. 이 무가는 우리나라 무속신화이면서 무속 서사시이다.

성조의 일대기는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유형을 따르고 있으며, 「새타령」·「배타령」·「소상팔경」·「나무타령」 등의 가요가 삽입 되어 서사적 국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서사시의 공식적 서술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神歌遺篇』(孫晋泰, 東京 鄕土文化社, 1930)
「무가」(서대석, 『한국민속대관』6,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집필자
서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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