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즉행(則行), 호는 연강(烟江). 참판 성몽정(成夢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예원(成禮元)이고, 아버지는 참의 성수익(成壽益)이며, 어머니는 최세신(崔世臣)의 딸이다. 목사 성호선(成好善)의 동생이다.
일찍이 천거에 의하여 관직에 나아가 도사(都事)로 재직하던 중 1594년(선조 27) 정시 문과에 응시, 동생 성계선(成啓善)과 함께 나란히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 형장(刑杖)을 남용하며 이서(吏胥)들을 지나치게 엄히 다룸으로써 소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폐단이 잦다 하여 파직된 일이 있었으나 곧 재기용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었다.
이 때 아들 성하연(成夏衍)과 조카 이생인(李生寅)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위 이상항(李尙恒) 등과 함께 대비를 모해하는 소를 올려 성진선의 처지를 난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절의를 지켜 끝까지 정청(庭請: 백관이 국정논의에 참여함)에 참여하지 않았다.
161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뒤 대사간·홍문관부제학·승정원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