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은 1945년 10월 4일이종렬(李鍾烈)·김영욱(金榮郁) 등이 창간한 『동신일보(東新日報)』이다. 『동신일보』는 광복 후 세 번째의 국문신문으로 출발하여 19호까지 등사판 신문으로 발행되고 그 뒤에 활자인쇄로 변경되었으며, 1946년 1월 지령 제58호를 끝으로 휴간하였다.
유자후(柳子厚) 등이 이를 인수하여 『세계일보』로 개제하고, 1946년 2월 2일자를 제1호로 발행하였다. 당시의 진용은 사장에 유자후, 발행인에 조성부(趙聖富), 편집인에 오삼주(吳三柱), 편집국장에 김현준(金賢準) 등이었다.
창간호에는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의 휘호가 실렸으며, 창간사에서 “완전한 독립자주의 민주주의 새 국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정권은 반드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수립하기를 절대 지지하자.”는 주장을 천명함으로써 우익지 성격을 띠었다.
인쇄사정 때문에 간헐적으로 겨우 10호를 발행하다가 휴간하게 되었으며, 4월 20일자로 속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간하였다. 그 뒤 1947년 2월 14일김종량(金宗亮)이 휴간 중이던 신문을 인수하여 같은 제호로 제1호부터 다시 새롭게 출발시켰다.
체제는 석간으로 타블로이드판 2면제였다. 발행인 겸 인쇄인은 김종량, 편집인 겸 주필·편집국장은 배성룡(裵成龍)이었다. 정부수립을 전후로 하여 가판(街販)의 시세가 가장 높았던 선동신문(煽動新聞)으로 유명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좌우익 중간노선의 인상을 짙게 풍겼다.
『우리신문』·『한성일보』와 함께 이용하던 인쇄공장이 1947년 8월 13일 테러단에 피습되어 일시 휴간되었으며, 1948년 9월 18일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여 13일 동안 정간되었다. 정간 해제 이후 민주언론으로서의 사명과 완전자주독립을 사시(社是)로 주장하면서 10월 5일자로 지면을 혁신하고 판형을 대판으로 확대하였다.
그 해 12월 29일자 한일통상잠정협약(韓日通商暫定協約) 관계기사로 ‘국제친선방해기사’를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미군정법령」 제88호에 의하여 1949년 1월 14일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