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 ()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인문지리
문헌
1454년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에 부록으로 수록된 지리서.
이칭
이칭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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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54년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에 부록으로 수록된 지리서.
개설

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에 거의 이용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독립된 『세종실록지리지』8권 8책이 편찬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세종실록지리지』를 발간하면서 연구자들이 그 내용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72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지리지가 포함된 『세종장헌대왕실록』의 한글 번역본이 나왔고, 2011년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 국역본, 한자 원문, 원본이 동시에 제공되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시대 전국 지리지의 편찬은 1424년(세종 6) 11월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지지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425년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먼저 편찬되었으며 이어 나머지 도의 지리지가 순차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재편집하여 1432년(세종 14)에 전국 지리지인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로 완성되었다.

1450년(세종 32) 세종이 승하한 후 1452년(문종 2)에 『세종장헌대왕실록』163권을 편찬할 때 세종의 업적이 많아 오례의(五禮儀) 8권, 악보(樂譜) 12권, 칠정산(七政算) 8권과 함께 지리지(地理志) 8권이 수록되었다. 기본적인 내용은 『신찬팔도지리지』를 기초로 하면서 거기에 빠져 있던 1419년(세종 1)에서 1432년(세종 14)까지의 사실 변화를 첨가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변화 상황은 특별히 세종 말년까지 반영하여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수록하였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수도였던 경도 한성부(漢城府)와 준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던 구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 이어 경기도(41) · 충청도(55) · 경상도(66) · 전라도(56) · 황해도(24) · 강원도(24) · 평안도(47) · 함길도(21) 등의 334개 고을로 이루어져 있다.

각 고을에는 일부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연혁, 고을의 별호, 속현과 그 연혁,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호구(속현도 따로 기재)와 군정의 수, 성씨(속현도 따로 기재), 토질과 전결(田結),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 토산, 누대,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1481년(성종 12)에 1차로 완성되고 여러 차례 증보하여 1530년(중종 25)에 최종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공물 · 조세 · 군역 등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 항목이 중앙에 보관되어 있던 공안(貢案)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반면에 『세종실록지리지』의 통계 대부분이 전국의 모든 고을에 일정한 규식을 내려 조사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어 당시의 인문지리적 내용과 실제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경상도지리지』의 총론 부분에는 경상도 전체에서 기록해야 할 것에 대한 규식이, 경주부 앞쪽 부분에는 각 고을에서 기록해야 할 것에 대한 규식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다만 『경상도지리지』에 수록된 것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것 사이에 상당한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전자의 것에 있으면서 후자의 것에 없는 것도 있고, 수록 방식이 다른 것도 있어 중앙에서 전국적인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일정한 원칙 하에 재편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실록지리지』는 고을별로 일정한 항목에 따라 편찬된 전국 지리지라는 점에서 고려보다 훨씬 강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을의 세세한 내용까지 수록된 전국 지리지의 궁극적인 편찬 목적은 전국 모든 고을의 조세 수취, 군역 징발 등의 제반 사항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고을의 통치는 해당 고을의 지배세력에 맡기면서 중앙에 바치는 조세와 군역 등의 총량만 파악하는 형태라면 고을의 세세한 내용까지 중앙에서 갖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찬팔도지리지』에 기초하면서 일부 지역의 변화 상황을 교정 · 첨가하여 수록한 『세종실록지리지』의 존재는 지방관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려 했던 조선 초기의 지방행정의 방향성과 전국적인 규모의 인문지리 정보를 잘 보여주는 자료 중의 하나로서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조선전기 지리지 연구: 동국여지승람을 중심으로』(서인원, 혜안, 2002)
「조선시대 전국지리지의 토산물 항목에 대한 검토」(이기봉,『문화역사지리』15-3, 2003)
「조선시대 읍지의 체재와 특징」(양보경,『인문과학논집(강남대학교)』4, 1997)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양보경,『지리학논총』별호 3,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1987)
『校訂世宗實錄地理志』(朝鮮總督府 中樞院, 1937)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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