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심양(瀋陽)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기 위하여 특별히 파견되었다.
청나라는 전쟁 중에 잡은 남녀 포로들을 참전한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병자호란 때 수만의 조선인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1637년 2월부터 국가적인 외교차원에서 또는 개인적인 노력으로 속환이 시작되었는데 반드시 몸값을 치러야 데려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심양에는 속환시(贖還市)가 열리기도 하였으나 그 값이 너무나 높아 속환은 수월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몸값의 앙등을 막기 위하여 남녀 귀천을 불문하고 상한선을 100냥으로 제한하고, 그 해 6월 10일 신계영(辛啓榮)을 속환사로 임명, 가족속환 희망자들을 인솔하게 하여 심양으로 파견하였다.
신계영 등은 16일 심양에 도착하여 7월 7일 돌아올 때까지 속환시를 열고 포로의 주인들과 흥정을 하였으나 몸값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러 일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결국, 수천인의 대상자들 가운데 겨우 600여 명만 값을 치르고 데려올 수 있었다.
그 뒤 11월에 사은사로 파견되었던 최명길(崔鳴吉) 일행이 다시 780여 명을 속환해왔다. 속환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으나 특별히 속환사가 파견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