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호(道號)는 송암(松庵). 충청도 청주 출신. 손병희(孫秉熙)는 서질(庶姪)이다. 1882년 동학에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없다고 하여 손병희를 입도시켰고, 문필이 뛰어나 동학의 각종 문서를 담당하였다.
1883년(고종 20) 손병희 등과 함께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수도와 문답을 하며 동학을 포교하였다. 1892년 삼례역(參禮驛) 집회에 가던 최시형이 낙상하자, 그곳에서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李耕稙) 등에게 의송문(議送文)을 보내 교도탄압 중지를 요구했으나 미온적인 반응만을 얻었다.
1893년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여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요구할 때, 상소문을 지었고, 서병학(徐丙鶴)의 무력사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보은 장내(帳內) 집회에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로 참가하였다.
1894년 9월 동학 제2차 봉기에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청안(淸安) 근방의 각 포(包)를 기포시켜 청주 북면에 1만여 명이 회합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교전했으나 대패하고 장내로 물러났다. 이후 영동·용산 등지에서 교전했으나 패하자 동학군은 해산하고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 쪽으로 피신하였다.
그 뒤 체포의 위험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포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896년 최시형이 그를 비롯하여 손병희·김연국(金演局) 등에게 도호를 내리며 세 사람이 합심해 교를 이끌어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순도(殉道)하자 손천민과 김연국의 순사 주장과 손병희의 복수 주장이 엇갈리면서 갈등이 나타나며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파들은 세력이 미약해 부득이 손병희파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1900년 손병희가 입도식(入道式)을 행할 때 박인호(朴寅浩)가 상위자가 되고 손천민은 성도주(誠道主)가 되었다.
최시형이 순도한 뒤 정부의 지목을 피하지 않고, 그 해에 체포되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아들 손재근(孫在根)은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