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자화(子和), 호는 지와(止窩). 송시철(宋時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광순(宋光洵)이고, 아버지는 송징은(宋徵殷)이다. 어머니는 수령 민도(閔燾)의 딸이다. 부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의 딸이다.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이태좌(李台佐) 등이 천거했는데, 반임(伴任) 때에 정명회(正明會)에서 조의상(趙儀祥) 등과 함께 윤증(尹拯)을 소환하고 송시열(宋時烈)을 핍박,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김진구(金鎭龜)의 반대를 받았다.
1703년 과천현감으로 동작진(銅雀津)의 방화사건을 잘 살피지 않고 모이를 피하고 모면하려고 했던 죄로 파직되었다. 사서·문학·정언·지평 등을 거쳐 1706년 암행어사에 제수되고, 도당(都堂)의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교리·수찬 등을 뽑기 위한 홍문관의 인사 기록)에 올라 교리·부수찬·수찬·헌납·이조좌랑·이조정랑·부응교·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09년 승지에 등용되었으며, 대사간·경상도관찰사를 거쳤다. 이듬해 참핵사(參覈使)가 되었을 때 일으킨 봉사욕국(奉使辱國: 사신으로서 국가 체면을 손상시킴)의 죄로 파직되었다. 대사간·승지·충청도관찰사를 지낸 뒤 호서(湖西)가 흉겸(凶歉)하므로 재차 충청도관찰사를 맡기자는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따라 다시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승지·대사성·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개성유수로 있을 때 임소(任所: 근무하던 곳)에서 죽었다. 그 곳의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송정명의 덕을 기념하여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