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정오(正吾), 호는 칠광(七狂). 아버지는 송상(宋償)이며, 어머니는 승사랑(承仕郎) 진영인(陳永仁)의 딸이다. 태인(泰仁)의 고현리(古縣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문장을 짓는 재능이 숙성하였으며 경사(京師: 서울)에 유학하여 명성을 떨쳤다. 1612년(광해군 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 때 세도(世道)가 혼란하고 정치적인 기강이 문란해졌으므로 이상형(李尙馨) 등과 더불어 폐모론을 반대하는 극렬한 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벼슬길이 막히게 되어 동지 6인과 더불어 호산(湖山)을 유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이르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금정찰방(金井察訪)·상서직장(尙瑞直長)·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형조좌랑·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호조좌랑·호조정랑·사복첨정(司僕僉正)을 거쳤다.
지방관으로서는 연기·경산·천안 세 읍을 거치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성적(聲績)이 있었다. 관직에 나가서는 특이한 일을 하여 이름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으며, 의지를 굳게 하고 청렴하여 부정한 사람을 멀리하였다.
사람됨이 바르고 학문도 깊었으므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명인들이었는데, 특히 이후원(李厚源)·윤신지(尹愼之)·심연(沈演)·신천익(愼天翊)·심제(沈癠)·이상형(李尙馨)과 친하였다.
당시 호남의 인재를 칭할 때는 송치중을 으뜸으로 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휴일에는 운사(韻士)와 더불어 소요하였다. 이 때 호를 호암(壺巖)이라 하였으며, 정(亭)을 사가(四可)라고 이름지었다.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