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퇴지(退之). 송여림(宋汝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악군수 송세훈(宋世勛)이고, 아버지는 임천군수 송남수(宋柟壽)이며, 어머니는 선무랑 유형필(柳亨弼)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시대의 정국이 혼미했으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에 임명되었고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
그 뒤 예조좌랑,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 성균관의 직강(直講)·사예(司藝), 사간원의 정언(正言)·헌납(獻納),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등 문한직(文翰職)을 주로 역임하였으며, 청하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기사관(記事官)으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간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당시의 폐해를 바로 잡는 데에 앞장섰다. 1635년에는 대사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외척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간언으로 재직 때 왕의 뜻에 거슬려 청하현감으로 좌천된 뒤 낙향하였지만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을에 망궐위(望闕位)를 설치하여 통곡하였고 그 뒤 향리에서 『소학(小學)』을 강론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