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 ()

목차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신라의 한성주총관 등을 역임한 장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670년
주요 관직
한성주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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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한성주총관 등을 역임한 장수.
내용

통일 전후에 활약한 장군으로 고구려정벌에 참여하였으며, 당나라에 들어가 외교활동을 하였다. 661년(문무왕 1) 7월에 조직된 고구려정벌군에 김군관(金軍官)·고순(高純)과 함께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으로 김유신(金庾信)을 따라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잔민의 진압이 시급하였고, 또 당군의 군량 보급을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의 고구려정벌군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평양성 함락 직후인 9월에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두 아들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을 포로로 하고 귀환할 때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 등이 함께 입당(入唐)하자 이들을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왕자 인태(仁泰)를 비롯하여 의복(義福)·천광(天光)·흥원(興元) 등과 같이 숙위(宿衛) 김인문을 따라간 전첩보고사(戰捷報告使)였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여 670년에 한성주총관(漢城州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정부의 입장과는 다른 내용 미상의 어떤 사건을 일으켜 도망가려다가 발각되어 대아찬 김진주(金眞珠)에게 피살되었다. 이 때의 김진주는 풍훈(風訓)의 아버지로서 백제정벌에 무공을 세운 김진주와는 동명이인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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