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전후에 활약한 장군으로 고구려정벌에 참여하였으며, 당나라에 들어가 외교활동을 하였다. 661년(문무왕 1) 7월에 조직된 고구려정벌군에 김군관(金軍官)·고순(高純)과 함께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으로 김유신(金庾信)을 따라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잔민의 진압이 시급하였고, 또 당군의 군량 보급을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의 고구려정벌군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평양성 함락 직후인 9월에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두 아들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을 포로로 하고 귀환할 때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 등이 함께 입당(入唐)하자 이들을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왕자 인태(仁泰)를 비롯하여 의복(義福)·천광(天光)·흥원(興元) 등과 같이 숙위(宿衛) 김인문을 따라간 전첩보고사(戰捷報告使)였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여 670년에 한성주총관(漢城州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정부의 입장과는 다른 내용 미상의 어떤 사건을 일으켜 도망가려다가 발각되어 대아찬 김진주(金眞珠)에게 피살되었다. 이 때의 김진주는 풍훈(風訓)의 아버지로서 백제정벌에 무공을 세운 김진주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