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주요항에 처치사(處置使)·절제사(節制使)를 두었다. 세종 때에는 주진에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 뒤에 水軍節度使)를 두었으며, 진영(鎭營)의 크기에 따라 첨절제사(僉節制使)·만호(萬戶) 등을 두었다.
삼남(三南: 慶尙·全羅·忠淸)의 수영에는 수사(水使)가 담당하는 여러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품관(品官)인 우후(虞候)를 두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통제영을 두어 통제사가 삼도수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의 수영은 충청수영(忠淸水營: 保寧)·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東萊)·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巨濟島, 뒤에 統營)·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麗水)·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海南) 등이다. 수군절도사가 있었던 수영은 경기도 남양·강화와 황해도 옹진이다.
대표적인 수영취락으로는 여수의 수영을 들 수 있다. 여수수영은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의 소재지로서 석성(石城)을 축조하고, 바닷길을 통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쪽 해협의 수중에 약 100m의 방왜축제(防倭築堤)를 쌓았다.
이 지역을 지키는 수군기지는 1423년(세종 5) 진례만호진(進禮萬戶鎭)에서 옮겨온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이었으나, 해안선이 길어서 왜변에 대비하기가 어려우므로 1479년(성종 10) 여수로 옮겨와 수영으로 승격, 신설되었다.
이곳은 왜군이 황해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어 군사상 요충지이며, 수사는 5관(五官)·5포(五浦)를 관할하였다. 군병은 해안의 지세와 조수에 정통한 주민들로서, 둔전(屯田)을 경작하여 자급자족하였다.
취락은 만안(灣岸)의 구릉지에 위치하며 주로 수군 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석보(石堡)는 여수반도의 중심에 위치하며 경제적 중심지를 이루었고, 돌산(突山)은 지방행정중심지로 큰 취락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