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군은 본래 동해(東海)의 한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가문은 동해에서 선조의 공덕으로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그는 궁지기(宮之奇)와 같이 나라가 망하기 전에 조국을 떠났으며, 백제유민 출신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사위가 되었다. 이로 보아 순장군은 백제나 고구려계통의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부인은 흑치상지의 중녀(中女)이며, 이들 사이에는 아들 흔(昕)·간(暕)·중용(仲容) 등 4명과 딸 1명을 두었다.
이 비는 중국 산서성 태원시로부터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용산(龍山) 천룡사의 뒤에 세워져 있다. 707년 10월 18일에 세워진 것으로서, 탁본의 크기는 높이 96cm, 너비 64cm이다. 곽겸광(郭謙光)이 짓고 글씨를 썼는데, 제액(題額)은 전서체(篆書體)이고 나머지는 예서체(隷書體)로 되어 있다.
해발 약 1,500m에 해당하는 천룡산에는 모두 25개의 석굴이 있다. 이 중에 상당수가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 조각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공적비는 707년경 불상헌납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당나라 때 불교 조각들의 편년 연구 뿐만 아니라, 그의 도상(圖象) 및 불상 제작의 후원자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메리인(Marylin,M.R.)은 순장군이 후원자가 되어 1년 5개월 만에 제작되었다는 3세 불상과 여러 성현들의 상이 천룡산 제21굴에 보존되어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 불상의 제작연대가 확인됨으로써 다른 조각품들의 편년에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천룡사는 북제 때에 세워져 수나라 말기에 쇠락하였다.
이것은 『산서통지(山西通誌)』에서 북제 때인 550년에 절이 세워졌다는 기록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로써 이 곳에 수나라 말기에서 8세기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조각품들이 희소한 원인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순장군이 이 곳에 이르러 불상 조각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은 이 절이 중흥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비문에 아내를 일컬어 ‘내자(內子)’라고 표기하고, 말미에는 순장군의 아들과 사위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중국의 다른 비문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다. 아마 이런 것들은 중국에 들어가서도 당시의 한국적인 형식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