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71년 8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견 · 조사되었다.
외형은 봉토가 거의 유실되어 원형을 남기지 않았으나 원형분으로 보인다. 봉토 기저부에 원형으로 호석을 배열한 흔적이 남았고 그 지름은 약 17m이다.
널방[玄室]은 거의 방형에 가까워 동서 2.6m, 남북 3.1m, 높이 3.1m이다. 크기가 다른 할석(割石)으로 네 벽을 축조하되 위는 약간 내경되었으며 대형의 판석 2매로 천장을 덮었다. 널방 안에는 2.6m×4.5m와 1.85m×4.05m의 두 개의 석재로 관대(棺臺)를 설치하였다. 관대는 벽에서 약간의 간격을 두면서 동쪽 벽에 붙여 서쪽에 많은 공간을 남겼다.
널길[羨道]은 서벽에서 연장되었고 길이 2.8m, 너비 1.1m, 높이 1.29m이며 남벽 선상에 외짝 석비(石扉)를 달았고 널길 끝은 잡석으로 폐쇄하였다. 석비에는 중앙에 구멍이 있어 손잡이를 달았던 자리로 보인다. 서벽 상부는 도굴로 인해 파손되어 토사가 흘러내려 밑에 쌓여 있었고 그로 인해선지 유물은 남은 것이 없었다.
널방, 널길, 문비(門扉) 전면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자연적 · 인위적 손상으로 거의 탈락되어 현재는 일부에만 남아 있다. 1930년경 도굴갱을 통해 고분 내부에 들어갔다는 촌로(村老)의 증언에 의하면, 네 벽과 그 앞에 드리운 장막에는 채색의 벽화가 있었으나 인위적인 손상이 많았다고 한다.
잔존한 벽화는 석비 외의 널길 천장과 석비 외면에서만 볼 수 있었다. 모두 회칠한 면 위에 그렸고, 천장에는 홍 · 황 · 흑의 3색으로 7엽 3중판의 너비 약 60㎝의 대련화(臺蓮花)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석비 외면에는 인물상으로 보이는 그림이 전면에 그려 있으나, 면회의 탈락이 매우 심해 화선이 완전하지 못하며 특히 상반부는 거의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고분 석비 내면에는 ‘乙卯年於宿知述干(을묘년어숙지술간)’의 8자가 세로 일렬로 음각되어 있었고 자획 안에는 주칠이 되어 있었다.
고신라시대 고분에서 피장자에 관한 기록이 발견된 일이 없었던 점으로 보아 이 표지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이 명문에 의해 이 고분은 술간(述干)의 관직에 있던 ‘어숙(於宿)’의 묘로 밝혀졌다.
축조연대는 ‘을묘년(乙卯年)’을 참고로 해 신라 진평왕 17년(595)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