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독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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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에 승문원(承文院) · 사역원(司譯院) · 관상감(觀象監) · 전의감(典醫監) · 훈련원(訓鍊院) 등에 두었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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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승문원(承文院) · 사역원(司譯院) · 관상감(觀象監) · 전의감(典醫監) · 훈련원(訓鍊院) 등에 두었던 관직.
개설

각기 이문(吏文 : 외교 문서에 사용되는 중국 행정 문체)·중국어·천문학·의학·군사학 관계의 지식을 강습시키기 위해 선발한 관원이었다.

그런데 대개 다른 관서의 하급 관원들로서 겸임시켰기 때문에 겸습독관이라고도 하였다. 1425년(세종 7) 관상감에 천문학습독관 10인을 둔 것을 시작으로 승문원에 이문습독관 20인, 사역원에 한학습독관(漢學習讀官) 30인, 전의감에 의학습독관 30인, 훈련원에 병학습독관 30인을 두게 되었다.

또 이들의 학습을 위해 관서마다 습독청을 두기도 하였다. 습독관은 처음에는 중인 기술관의 자제들을 임명하기도 했으나 뒤에는 주로 문신·생원·진사 등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문관들에게도 이러한 전문 지식을 습득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의학과 중국어는 의관·역관들의 독점적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문관들의 학습이 요청되었다. 훈련원의 습독관은 내금위(內禁衛) 등의 무관이 겸직했고, 기타의 습독관들은 성균관·교서관·승문원의 참하관(參下官)이나 진사·생원, 혹은 문음 출신의 젊고 재능이 있는 자로서 임명하였다.

내용

이들은 종6품∼종9품의 서반 체아록을 받도록 하였다. 천문학습독관은 처음에는 천문·금루(禁漏 : 궁중의 물시계)·풍수학의 분야별로 각각 20인·40인·10인의 습독관을 두었으나, 뒤에 통합해 천문학습독관 10인만 두었다. 이들은 종6품에 이르면 물러나야 했는데 수령 취재에 합격하면 수령으로 임용되었다.

또한 습독관에서 물러났으나 해당 분야에 정통한 사람은 이습관(肄習官)으로 지정, 계속해 그것을 전공하도록 하고, 무록관의 예에 따라 관직에 임용하도록 하였다. 의서습독관은 1459년(세조 5)에 15인을 두었으나 1462년에 30인으로 늘렸다. 한학습독관은 사관(四館)의 참하관, 성균관과 4학의 학생, 문음 자제들로서 임명하였다.

그러나 문관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성적이 우수한 자들은 특별히 청요직에 승진시키는 규정을 만들었고, 중국 사행에 젊고 재능 있는 습독관들을 동참시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역주경국대전-주석편-』(한우근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이성무, 『류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1971)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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