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월 23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11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25년경부터 10년간은 프로문학파와 민족문학파가 우리 문단을 할거하였다.
이 시기에 민족문학파에서는 시조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그 작품과 이론의 수준이 프로문학파의 주장에 비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 결과 시조의 존립 의의에 대한 찬부(贊否) 양론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의도로 집필된 것이 이 논문이다. 시조는 정형이며 고전적이면서도 오히려 그 존립 의의는 정형과 고전적임에 있다고 설파하면서 명료하고 평이한 대중문학, 진실하고 신선한 사실문학(寫實文學)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시조가 혁신되어야 할 점으로, ①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 ② 취재(取材)의 범위를 확장하자, ③ 용어의 수삼(數三), ④ 격조(格調)의 변화, ⑤ 연작(連作)을 쓰자, ⑥ 쓰는 법, 읽는 법 등 여섯 가지를 들었다.
종래의 투어(套語)나 인습적인 작법에서 벗어나자는 것, 취재의 범위를 넓혀 자기류의 작풍(作風)을 수립하자는 것, 부르는 시조보다도 짓는 시조, 읽는 시조로 발전시키자는 것이 중심 골자였다.
특히 격조에 대하여 “격조는 그 말과 소리와 합치한 그것에 있다.”고 함으로써 양자의 결합 관계로 고찰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발전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짓는 시조, 읽는 시조를 강조한 나머지 부르는 시조와의 화해를 전연 고려하지 않은 태도는 온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시조의 과거가 창(唱)의 흐름이었다는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연작의 문제인데, 과거의 것은 각수(各首)가 독립된 상태였던 것을 제목의 기능을 살리고 현대시 작법을 도입하여 여러 수가 서로 따로 존재하면서도 통일되도록 짓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창작으로 실천하여 완성한 이가 이병기 자신이었고, 오늘날 형태의 발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엄격히 보아 시조의 전통적 연작법으로서는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