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를 올릴 때는 먼저 옥책(玉冊)과 보인(寶印)이 만들어진다. 옥책은 남양(南陽)의 청옥(靑玉)을 썼으며, 크기는 길이 9촌7분, 너비 1촌2분, 두께 6분이다. 옥편의 수는 책문의 길이에 의해 정해졌다.
보인은 주석(朱錫) 또는 연황동(鍊黃銅)으로 주조해 도금한 것으로서 금보(金寶)라고도 하며, 크기는 방(方) 3촌5분, 귀고(龜高) 1촌5분이다.
시책을 올리기 위해 시호도감(諡號都監)이 설치되고,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도청(都廳)·낭청(郎廳) 등 유사가 임명되며, 그 밖에 수십 명의 관원·아전·장인들이 일을 맡았다.
시책을 올리는 의식은 대단히 정중하였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관계한 사람들에게 상이나 은전이 베풀어지는 것이 통례이다.
시책의 서식(書式)은 옥책의 서식과 같으며, 다만 존호(尊號)를 시호로 바꾼 것이 다르다. 시호를 가상(加上)할 때나 처음 시호를 올릴 경우는 ‘가상’을 ‘상(上)’으로 쓴다.
시책 그 자체는 사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 것이 못 되나 시책을 올리기 위하여 시호도감을 설치한 다음 많은 관원들이 동원되어 이를 정중히 행사하는 의식이 베풀어졌던 바, 과정의 하나 하나가 당시 왕정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래의 시책으로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책의 내용이 전재(轉載)된 것은 규장각도서 가운데 시호도감의궤(諡號都監儀軌) 여러 책이 있어, 시책을 올리는 과정의 제반 의식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