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에 신파극단 예성좌(藝星座)가 해산되자, 1917년 혁신단(革新團)의 단원이었던 배우 김도산(金陶山: 본명 金永根)을 대표로, 이경환(李敬煥)·변기종(卞基鍾)·서재원(徐在元)·이원규(李元圭)·윤혁(尹赫)·홍연현(洪延鉉)·김소진(金少珍)·나효진·김영덕·한철순 등 혁신단 단원과 예성좌 단원이 모여 발족한 신파극단이며, 대구의 부호(富豪) 정인기(鄭麟基)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극단 신극좌는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신파극「의기남아(意氣男兒)」·「견이불견(見而不見)」·「은의(恩義)의 발포(發砲)」·「캬츄샤」·「비파성(琵琶聲)」·「덕국토산(德國土産」·「천리마(千里馬)」등을 공연하였다. 1919년 11월 이후에는 활극(活劇)「시우정(是友情)」과 같은 연쇄극(連鎖劇)을 주로 상연하였다.
특히 1919년에 우리나라 영화의 효시가 된 연쇄극「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비롯해서「형사고심(刑事苦心」, 1920년「의적(義賊)」 등을 공연했으나,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다. 1920년 2월에는 구력망년흥행(舊曆忘年興行)으로 취성좌(聚星座)와 합동공연을 가졌으나, 단장 김도산이 사망하자 해산되었다. 이 극단은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 이기세(李基世)의 문예단(文藝團), 김소랑(金小浪)의 취성좌 등과 함께 1910년대 신파극을 대표하던 초창기 신파극단이며, 아직 토착화되지 않은, 왜색이 짙은 신파극을 공연하였다.
우리 나라 영화의 효시인 연쇄극을 최초로 공연한 극단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