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대는 1931년 9월에 극단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에서 탈퇴한 신불출(申不出)·이종철(李鍾哲)·전경희(全景希)·이원재(李元在) 등과 성출(成出)·송해천(宋海天) 등이 모여 조직하였다. 이들은 신불출의 주재로 희극을 목표로 출발하였으며, ‘희극의 총본영’임을 자처하였다.
신무대는 창립공연으로 1931년 9월에 단성사(團成社)에서 신불출이 쓴 향토극「아리랑 반대편」과 송해천(宋海天)이 번안한「옛집이 그리워」, 안광익(安光翊)의 번안희극「쌍초상」을 공연하였다. 주로 이 극단은 단성사를 본거지로 삼아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32년부터는 지방순회 공연을 하였다.
극단 신무대는 1932년 7월, 같은 해 3월에 탈퇴하여 예술좌예술좌(藝術座)라는 분파를 만들었던 임서방(任曙昉)·하지만(河之滿) 등 단원 일부가 복귀하면서 협동신무대(協同新舞臺)로 개칭하였다가, 1934년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 후원으로 남부 지역 순회공연을 시작하면서 다시 신무대로 개칭하였다.
1932년 9월부터 이 극단은 연쇄극(連鎖劇)「젊은이여 울지 말자」·「홍길동전」등을 만들었고, 나운규(羅雲奎)를 감독으로 맞아들여「암굴왕(巖窟王)」·「아리랑」등을 단성사에서 상연하였는데, 이들 연쇄극은 1933년까지 주요 공연작품이었다.
1934년 지방순회공연을 다니면서부터는 비극과 희극·시대극·현실풍자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공연하였고, 당시 활약하였던 이운방(李雲芳) 작「청년」·「기생」·「그는 왜 울어야할까」, 김진문(金振文) 작「숙영낭자전」·「정열의 에디오피아」·「동심」, 임선규(林仙圭) 작「학생가」·「제2의 운명」·「호천비혼」, 박영호(朴英鎬) 작「거룩한 손님」·「목화」등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이 극단은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순회공연을 다닐 만큼 인기를 끌었던 신파극단이었지만, 1935년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어 그 전속극단들이 맹활약하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결국 지방을 떠돌다가 1937년 5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이 극단은 1930년대 상반기에 대중연극이 뿌리를 내리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