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신재연(辛載淵, 辛在淵). 1891년(고종 28) 호남 포교 후 정부의 지목을 피하려는 최시형(崔時亨)이 충주 외서촌(外西村)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894년 9월 진천의 허문숙(許文淑), 지평의 맹영재(孟英在) 등이 유학당(幼學黨)을 결성하고 동학교도를 참혹하게 살륙하자 북접 지도자들은 최시형에게 기포(起包: 包의 조직을 중심으로 봉기함)를 허락받아 충주·이천·양지 일대의 동학교도를 동원하였다.
이 때 접주로서 홍재길(洪在吉)과 함께 충주 5읍의 동학군 4만∼5만 명으로 충주에서 거병하여 황산(黃山)에 집결하였다. 그곳에서 허문숙의 군과 평화를 유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허문숙의 군이 다시 동학도를 침해하자 그들과 대치하였다.
이전에는 남접의 투쟁을 비판하고 근방의 과격한 동학교도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방(榜)을 붙이는 등 온건한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의 효유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문숙군의 해체를 요구하다가 드디어 진천을 공격하여 현감 등 관속을 결박하고 군기를 탈취하여 음성의 무극(無極)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 괴산을 공격하여 읍 전체를 불태웠으나,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당하였다. 그 뒤 북접의 동학군이 보은장내에 집결할 때 가담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