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일명 신철회(申哲會).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암(島菴). 경상북도 문경 출신.
한말에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와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거의(擧義)하여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에 사는 강용이(姜龍伊)를 농암시장(籠巖市場)에서 사살하였다.
그 뒤 1907년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고 도대장(都大將)에 취임해, 울진·평해·영양·영월·산동·제천·원주·홍천·춘천·철원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러는 중에 그 해 9월 일본 경찰에 의해 본가가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1908년에는 홍천전투에서 패하여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의 총탄에 어깨를 부상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주의 산안전투(山安戰鬪)에서 왜장 조[長三郎]를 생포하여 주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2월 14일 영평(永平)의 이동전투(裡洞戰鬪)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1909년 1월 9일 경성감옥에 수감되어 그 해 4월 20일 경성공소심에서 교수형이 언도되었으나, 영해면민들이 입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던 사실을 들어 진정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 19일 출감한 뒤,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지방에서 조선독립 후원을 위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선임되었다.
신태식은 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김돈희(金敦熙)·김동진(金東鎭) 등의 동지를 규합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이듬해 가을에 붙잡혔다.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재수감되어 다음 해 12월에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