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96㎝, 가로 57.5㎝이다. 상단의 전서(篆書)로 “辛亥生甲會之圖(신해생갑회지도)”라는 제목, 중단의 계회 장면, 그리고 하단에 자리한 24행의 묵서(墨書)로 구성되었다. 묵서 중 3행은 좌목(座目)으로 계회 참석자인 이대기(李大期), 정인준(鄭仁濬), 홍순각(洪純慤)의 관직, 성명, 자, 생일, 본관, 거주지가 순서대로 적혔다. 이어서 17행에 걸쳐 모임의 내용 및 전말을 밝혔으며, 마지막 4행은 칠언시(七言詩)를 써넣은 것이다. 동갑계(同甲契) 모임 장면을 16세기 전반의 계회도 형식을 충실히 따라 그렸다.
전서로 쓴 제목 및 묵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신해년(辛亥, 1551) 같은 해에 태어난 3인이 동갑계를 연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다. 1617년(광해군 9) 홍순각이 합천군수 재직 시 가까운 곳에 살던 이대기, 그리고 역시 합천 출신인 정인준과 서로 친밀하게 지내다가 68세가 되던 해인 1618년과 1619년에 걸쳐 모임을 가졌다. 같은 해 태어난 이들이 생일 순서로 술잔을 들었고, 자리 또한 직위가 아닌 이 순서에 따랐으며 예도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1622년(광해군 14) 정인준의 아들 정탁(鄭濯)이 서울에서 이대기에게 계축(契軸)을 보내 같은 해 9월 그 내용을 묵서로 적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계회도의 제작연대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은 세 번째 모임을 불과 20일 남기고 홍순각과 이대기가 타처로 가게 되어 더 이상 모임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17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나 화면 구성과 구도, 그리고 배경의 산수에 비해 인물은 작게 나타내는 등 16세기 전반의 계회도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계회의 주인공인 3인과 좌우 2명이 자리하고, 더불어 시중드는 인물까지 그려 넣어 모두 9명이 등장한다. 산세 처리 기법이나 수목 표현에 있어 조선 중기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여운이 짙다.
17세기 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사(畵師)에 의해 그려진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성립 과정에 있어 정선(鄭敾)에 앞선 양태를 보여 준다. 현재까지 공개된 그림들 중 동갑계 모임을 주제로 한 유일한 그림이라는 점, 그리고 실제 동갑계 모임의 진행 과정을 시사하는 등 풍속사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