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5년(우왕 1) 나주의 회진(會津)에 유배가 있을 때 지었다. 1394년(태조 3)권근(權近)이 상세한 주석과 서(序)를 달아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는데, 『삼봉집』에는 이 합본이 실려 있다.
마음은 이렇게 운을 뗀다. “을묘년(1375) 늦겨울 14일, 하늘은 맑고 달은 밝으며, 모든 동물의 수선거림이 잦아든 저녁, 한 물건이 상청(上淸)에 올라 옥제(玉帝)의 뜰에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상제의 명령으로 사람에게 가장 신령스런 물건이 되었는데, 이처럼 영묘한 물건이 눈과 귀의 감각적 욕구와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신체적 행동과 언제나 갈등을 겪는다. 원칙적으로 마음의 의지는 기(氣)의 신체적 감각적 활동을 통제하고 이끌어야 하지만, 마음은 약하고 기는 강해서 이 싸움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성경(誠敬)으로 갑옷을 삼고, 의용(義勇)으로 창을 삼아” 펼치는 이 전투에서 하늘의 명령을 지켜낸 자는 선한 자이고 빼앗긴 자는 악한 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보응(報應)에 있다. “배반한 자는 오래 살고, 복종한 자는 요절하며, 따르는 자는 빈궁하고, 거역하는 자는 부귀를 누린다.” 하늘의 상제께서 하민(下民)을 주재하시는데 어떻게 이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처사를 내릴 수 있느냐. 이것이 질문의 요지이다.
이에 대해 하늘의 답은 유가적 세계관을 축으로 전개된다. 즉, 하늘은 인간의 마음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德)을 부여해 만물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 덕으로 하여 일용간(日用間)에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주었는데, 무슨 딴소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의 이(理)뿐만 아니라, 기(氣)도 함께 나누어 받았다. 마음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배반하면 그 여독은 하늘의 조화와 안정적 운행을 다친다. 그렇다면 마음인 네가 나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인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할 일이라고 짐짓 되받아친다.
불교적 인식에서와는 달리 유가의 근원자인 하늘은 길흉화복에 대한 직접적인 보응의 주체가 아니라고 했다. 하늘은 따로 정한 때가 있으니 마음은 “다만 올바름을 지켜, 나의 정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