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에 간행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는 중국판화사에서 최고봉이며 판화제작기술에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사군자화와 영모화 등의 채색법에 특히 많은 영향을 준 이 십죽재화보가 서울에 들어온 것은 1700년대 초였다. 아름다운 오채판화집(五彩版畵集)인 십죽재화보는 10여 그루의 대나무를 심고 즐겨보면서 집 이름을 스스로 십죽재(十竹齋)라 한 호정언이 지은 이름이다.
내용은 서화책(書畫冊), 묵화보(墨華譜)‚ 과보(果譜)‚ 영모보(翎毛譜)‚ 난보(蘭譜)‚ 죽보(竹譜)‚ 매보(梅譜)‚ 석보(石譜)의 여덟 분야로 나누어져 있고, 한 분야는 그림 20폭과 해설 20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팔종보(八種譜)·매종이십도(每種二十圖)·일도일문(一圖一文)이라는 뜻이다. 그림은 호정언·오빈(吳彬)·오사관(吳士冠) 등 20여명이 그렸고, 해설문은 수십 명이 썼다.
조선시대에 이 채색화보를 보고 배우면서 모방작을 남긴 화가는 수십 명인데 정선(1676∼1759)·심사정(1707∼1769)·강세황(1713∼1791)·김홍도(1745∼1806?) 등이 유명하다. 특히 심사정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아 중국냄새가 짙은 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