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후주인(後周人)으로 산둥지방 칭저우(靑州)의 수령이던 쌍철(雙哲)의 아들이다. 후주에서 벼슬해 산둥반도[山東半島] 등저우[登州]에 있는 무승군(武勝軍)의 절도순관(節度巡官)·장사랑(將仕郎)·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를 지냈다.
956년(광종 7) 후주의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머물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 광종(光宗)의 눈에 들어 후주로부터 허락을 받은 뒤 원보(元甫)·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958년 과거제도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959년에는 쌍철이 고려에 와서 좌승(佐丞)이 되었다. 아들 쌍기가 광종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고려의 사신 왕긍(王兢)을 따라와 관직을 받은 것이다.
958년 5월 처음으로 실시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 고려시대의 과거시험관)가 되었다. 이때 시(詩)·부(賦)·송(頌)·책(策)으로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진사(進士) 갑과(甲科)에 최섬(崔暹)·진긍(晉兢) 등 2인과 명경과(明經科)에 3인, 복과(復科)에 2인을 선발하였다.
960년에 실시된 과거에서 지공거가 되어 최광범(崔光範)·서희(徐熙) 등 7인을 진사 갑과로 뽑고, 명경 1인, 의업(醫業) 3인을 뽑았다. 961년에 실시된 과거에서도 지공거가 되어 왕거(王擧) 등 7인을 진사 갑과로 뽑고 명경업에 1인을 뽑았다.
최승로(崔承老)는 광종을 평하면서 “쌍기를 등용한 이후로는 문사(文士)를 높이고 중히 여겨 은례(恩禮)가 지나쳤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제현(李齊賢)은 쌍기에 관해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겉치레만 화려한 모습의 문(文)을 주창해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후주에서 닦은 경륜을 살려 광종의 개혁을 도왔던 쌍기의 활약이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