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 ()

연극
단체
1939년 8월에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 등에서 활동하던 연극인들이 설립한 상업 극단.
정의
1939년 8월에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 등에서 활동하던 연극인들이 설립한 상업 극단.
연원 및 변천

아랑(阿娘)은 1939년 상업주의 연극의 아성이었던 동양극장의 경영진이 바뀌자 그 전속극단이었던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 등에서 활동하던 임선규(林仙圭)·황철(黃澈)·차홍녀(車紅女)·서일성(徐一星)·맹만식(孟晩植)·김선초(金仙草) 등 16명이 탈퇴하여 같은 해 가을 제일극장에서 새로이 결성한 극단이다.

1939년 9월 27일 대구극장에서 임선규 작, 주봉(周峰) 연출, 원우전(元雨田) 장치, 「청춘극장」으로 창단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마산·진주·순천·광주·목포·이리·군산·대전·서울 등에서 한달 남짓 전국적인 순회공연을 올렸고, 같은 해 12월 임선규 작 「그들의 일생」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공연하였다. 1940년 초에도 제일극장에서 남궁춘(南宮春) 작 「안해의 고백」로 막을 올렸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드라마였다.

이 밖에 작품으로는 1942년 제1회 국민극 경연대회 출품작 김태진(金兌鎭) 작 「행복의 계시」, 1943년 제2회 국민극 경연대회 출품작 박영호(朴英鎬) 작 「물새」, 1945년 제3회 국민극 경연대회 출품작 김승구(金承久) 작 「산하유정(山河有情)」, 임선규 작 「김옥균(金玉均)」·「인생설계」·「바람부는 계절」·「마음의 고향」등이 있다.

극단 단원으로는 황철·차홍녀·서일성·맹만식·김선초 외 작가 및 연출가·장치가를 제외하고도 배우 양백명(梁白明)·김두찬(金斗燦)·기준(騎駿)·임수엽(林樹葉)·양진(梁進)·이몽(李夢)·임사만(任士滿)·고설봉(高雪峰)·박영신(朴永信)·최은연(崔銀燕)·문정복(文貞福)·최승이(崔承伊)·이정순(李正順)·김경숙(金敬淑) 등과 아역(兒役)으로 유명하였던 엄미화(嚴美花) 등이 있다.

1940년부터 8·15광복 전까지는 일제의 연극통제에 의하여 극단 아랑을 포함하여 당시 뛰어난 많은 단체가 조선연극협회에 강제로 가맹하여, 이른바 일제의 전쟁완수를 위한 선전극단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아랑의 공연은 인기와 대중들의 호응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무분별한 신파극이 아닌 공연 여건과 특수성을 고려한 내실 있는 연극을 나름대로 추구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연극에 대한 진지한 성찰, 즉 진정성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이 대목에서 아랑은 친일어용연극 단체였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한국 근·현대 연극100년사 편찬위원회, 집문당, 2009)
『한국연극반세기』(강계식, 현대교육출판부, 1986)
『한국연극사조연구』(장한기, 동국대학교 한국학연구총서 8, 아세아문화사, 1976)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극단 아랑의 공연사 연구-국민연극경연대회 참여 시기를 중심으로-」, (김남석, 『어문논집 56』, 2007)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