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17m. 한국 최고(最古) 최대의 전탑이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제작연대에 서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단층 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는 없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 너비 약 14㎝, 두께 약 6㎝의 회흑색 무문전(無文塼)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 옥신(屋身)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서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는데,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의 네모난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1층 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고층인데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단·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면 당초에는 각 층 낙수면에 모두 기와를 입혔던 듯하다. 이것은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탑은 목탑을 번안(飜案)한 것임을 보여 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부동5리(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에 비정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上有金銅之飾李股撤而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상유금동지식이고철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이라는 각주(脚註) 내용으로 보아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