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 아버지는 부호군 안담(安燂)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다. 사관(史官)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승정원주서에 올랐다.
그러나 1548년(명종 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1570년에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았다.